I. 서론
연명의료결정법은 ‘잘 죽기(well-dying)’ 위한 법이 아니다. 말기나 임종과정이 되면 생명연장을 위한 치료가 무익해진다고 해석하는 법제도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2018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2025년 8년차에 접어든다. 법률 시행 후 여러 시행 착오를 거치기는 하였으나 환자, 가족의 뜻과 상관없는 무익한 연명의료를 지속하며 일어나던 불필요한 갈등은 줄고 존엄한 삶의 마무리에 관한 대중들과 의료 현장의 고민은 늘었다. 이는 법제도가 도입된 취지이기도 하다.
저자가 환자 가족의 동의를 받아 제공한 어느 말기암 환자의 사례는 반드시 연명의료결정법의 맹점과 한계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법률 조항과 문구만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사전돌봄계획, 그리고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삶과 죽음의 가치에 대해 의료인들이 인식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서는 중환자실 의사의 시각으로 연명의료결정제도와 발전 방향과 이 사례가 갖는 의미를 연결하여 보고자 한다.
Ⅱ. 본론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의학적 상태를 ‘말기환자’,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말기와 임종과정을 구분하는 시점은 명쾌하지 않고, 임종징후는 사망을 수 시간 또는 이삼 일 앞둔 시점이 되어서야 뚜렷해진다[1]. 인공호흡기 등 적극적인 생명유지 장비와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 시간 기준은 매우 부정확하다. 법률이 지향하는 목적을 주목하여 보면 ‘환자의 최선의 이익’, ‘자기결정 존중’, ‘인간의 존엄과 가치 보호’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한의학회는 법 시행을 앞두고부터 지침을 통해 사전돌봄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2]. 사전돌봄계획은 환자가 가족, 의료진과 함께 자신의 치료에 관해 논의하고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으로 이를 통해 개인의 가치관을 파악하여 치료의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전돌봄계획의 수립 시점은 임종기로 제한할 필요가 없고 질병의 조기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질병의 경과 등에 따라 반복하여 조정하고 갱신할 것을 권고한다[2]. 실제로 법률 조항은 의학적 관점에서는 불완전하므로 법이 지향하는 법률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들이 사전돌봄계획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환자의 미충족 필요, 환자의 가치관에 맞는 치료 방향과 목표, 그에 따른 환자와 가족에게 최선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돌봄의 내용과 방법을 합의하여 결정할 수 있으며 또 그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은 연명의료계획서 등 관련 서식의 작성 시점을 말기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사전돌봄계획 조기 수립에 불필요한 문턱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해결하고 법의 목적과 조항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서식 작성 시점을 확대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시된 사례는 적극적인 완화치료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이미 2012–2015년 사이 항암약물치료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2018년 호흡기내과 전문의는 전신상태 등을 종합하여 대한의학회 지침[2]에 따라 말기 진단 및 사전돌봄계획을 수립할 것을 권유하였고 종양내과 전문의는 말기 상태에 대한 정의를 달리 해석하였다. 그 이후 적극적인 사전돌봄계획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아 환자와 보호자는 의학적 문제로 입원할 때마다 폐렴 치료, 기관절개술, 재택산소, 위루술 등 각 분야별 전문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사례에서는 환자와 가족의 입장에서 미충족 의료와 돌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발생하는 문제를 의료진은 최선을 다해 해결해왔기 때문에 사전돌봄계획의 유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사전돌봄계획은 단순히 의학적 치료의 목표와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에 국한하지 않는다. 계획 수립을 위해 환자의 선호, 가치를 파악하고 그에 근거하여 환자와 가족에게 필요한 의학적 처치와 말기 돌봄의 내용과 방법을 결정하고 조정할 수 있다. 즉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의 목표에 일치하는 치료(goal-concordant care)를 제공함으로써 환자-의료인, 의료인-의료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불필요한 윤리적 갈등이나 오해를 예방할 수 있다. 더불어 환자와 가족은 질병의 경과와 결과를 이해할 수 있고, 환자가 남아 있는 여명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사례에서는 2022년 두 번째 연명의료 상담을 하게 되기 전까지 의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 환자와 배우자가 어떠한 돌봄이 필요하고 어떠한 바램을 가지고 있었는지 치료에 관여하고 있는 의료진이 환자 가치 중심의 치료 목표(goal-of-care)를 파악하거나 공유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의료현장에는 적시, 적절한 사전돌봄계획 수립을 가로막는 여러 장애 요소들이 존재한다[3-5]. 이 사례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의료인들의 인식 부족[3], 의료기관과 의료인들의 준비 부족[4], 바쁘고 과중한 업무와 관련 교육의 부족[5] 등은 대표적인 장애 요인이다. 의료기관마다 리더십이 주요 장애 요소들을 분석하고 확인하여 해결책을 기관의 정책으로 통합할 수 있어야 환자, 가족, 의료인 사이에 사전돌봄계획 논의가 수월해지고 비로서 연명의료결정제도를 도입한 목적을 의료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존엄한 삶의 마무리’이다. “존엄한 죽음"을 정의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이고 변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 안녕, (환자의) 자율성, 의미(meaningfulness), 준비, 인간 관계라는 인간의 외적 특성까지 아우르는 일이다[6]. Randall Curtis와 동료들은 일찍부터 죽음의 질 ‘The quality of dying and death(QODD)’을 평가하는 연구를 통해 “존엄한 죽음”의 여섯 가지 요소를 각각 신체적 편안함(고통 없음), 심리적 안녕감, 영적인 평화, 존엄성, 자기 통제력, 가족(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마무리를 꼽았다[7,8]. 하지만 이러한 내적, 외적 요소의 우선 순위와 조건은 환자, 환자 가족의 특성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며 의료진이 결정해 주거나 대신 판단하여 줄 수 없다. 때로는 의료인의 시각에 적절한 수준의 임종 돌봄을 가족이 불만족할 수 있고, 반대로 의료인이 바라볼 때 존엄하지 않은 죽음을 환자나 가족은 최선을 다한 노력이었다고 안도하기도 한다.
제시된 사례는 흔하게 마주치는 질병과 죽음의 궤도(trajectory)는 아니다. 원격 전이암이지만 질병의 경과가 느렸고 말기 전신 상태임에도 의료진은 중환자실 집중치료, 폐렴 치료, 기관절개술, 재택산소, 위루술 등 적극적인 의학적 처치를 이어갔다. 2018년 기관절개술과 위루술 시행 이후에도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입퇴원을 반복하였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정확한 의도와 선호, 가치관에 관한 정보는 부족하였고 환자의 배우자의 의사가 적극 반영되었다. 중환자실 의사의 시각으로 이러한 의학적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제공하는 집중치료는 윤리적으로 갈등하게 된다. 죽음의 질(QODD)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환자의 삶의 질과 존엄성이 우려된다. 그리고 의료 자원의 분배 정의(정의의 원칙), 환자의 자율적 판단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환자의 존엄성(환자의 자율성 존중), 신체적 안녕과 치료 사이의 균형(선행의 원칙과 해악금지 원칙 사이의 충돌) 등 의료 전문직으로 지켜야 할 생명윤리의 기본 원칙을 갈등하게 된다.
사례의 경우 2022년이 되어 호흡기내과 담당의사의 주도록 적극적인 연명의료계획에 관한 상담과 ‘심폐소생술 하지 않음’, 임종 상황 대처 방법 등 사전돌봄계획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담당의사가 어떠한 문제 의식과 윤리적 갈등을 인식하고 있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연명의료유보중단에 대한 상담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배우자라는 대리인을 통해 표현된 환자의 선호, 삶의 질, 죽음의 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제시된 정보에 입각할 때 환자는 마지막 순간에 침습적 치료와 생명연장치료 대신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가족과 의료인 사이에 별다른 윤리적, 법적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례에서 가족들이 환자의 삶, 장기간의 돌봄, 삶의 질과 죽음의 질에 대해서 부여한 의미와 가치를 외부자인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중환자실 의사가 고민한 생명윤리원칙과의 상충이나, 죽음과 삶의 질, 존엄성에 대한 우려만큼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사례를 통해 사전돌봄계획을 적절한 시점에 수립하지 못하는 어려움, 담당의사의 내적 갈등을 촉발할 정도로 연명의료가 지속되는 법과 제도의 한계, 연명의료결정제도가 담고 있는 가치 실현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존재와 가치를 매개로 환자의 가족과 치료와 돌봄의 목표 설정에 관한 대화를 시도하였고, 가족도 환자의 삶의 마무리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의사와 가족 사이의 의사결정 방식과 마지막까지 가족이 제공한 돌봄의 방식 또한 환자와 가족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저자가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대해 가진 우려보다 법제도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관점이 필요하다.
Ⅲ. 결론
이 사례는 연명의료계획서 등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실제 의료현장에서 적절한 시기에 연명의료유보중단에 관한 의사결정과 사전돌봄계획 논의가 천천히 진행하는 진행성 전이암이라는 질병의 특성 하나만으로도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가 보여주는 현실과 어려움이 연명의료결정제도의 무용함이나 한계라고 단정 짓는다면 사례가 가진 다양한 함의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 해석하는 오류일 것이다.
사례처럼 사전돌봄계획의 적절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결국에는 사전돌봄계획과 적극적인 공유의사결정(shared-decision making) 과정을 통해 죽음이 예견되는 환자에게 최소한의 죽음의 질과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9,10]. 중환자실 의사의 시선에서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의료인과 환자, 환자 가족 사이 적극적인 의사소통의 기회를 제공한다. 의료인에게 생명윤리의 기본 원칙을 적용하고 실현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 아울러 임종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앞으로도 다양한 어려움을 가진 사례를 동료, 구성원, 전문가들과 소통함으로써 의료인의 윤리적 판단 능력이 개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