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최근 ‘의사조력자살’이 ‘조력존엄사’라는 표현으로 둔갑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안규백의 원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제는 ‘의사 조력자살’마저 존엄사로 표현하는 상황까지 왔다. 이 개정안은 여론조사에서 80%가 안락사에 찬성하고, 임종환자가 아니라도 본인의 의사로 자신의 생명을 종결할 권리를 인정하기 위하여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안이유다. 2022년 8월 국회에서 열린 [‘조력 존엄사’ 법안 토론회]에서 윤영호는 소위 연명의료 결정법이 기대만큼 효과가 없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 등으로 ‘환자의 죽음 선택권’인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의사 조력자살 입법화를 통해 환자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증진하려고 한다는 취지는 공감 하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고, 방향자체도 완전히 틀렸다. 고윤석은 위 논문에서 의사조력자살 법제화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 논평에서는 존엄사와 환자자기결정권 개념의 헌법적 오용(誤用)에 대하여 지적하고,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에 대하여 검토한다.
2. ‘존엄사’ -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 된 탱자
과거에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처음부터 생명 단축을 목적으로 그 생명을 단절시키는 적극적 안락사와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된 환자에 대해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생명유지처치를 포기·유보하는 소극적 안락사로만 나누었다[2]. 하지만 20 세기 후반 진통의학의 발전과 심폐소생술, 인공호 흡기 등의 등장으로 분류가 복잡해졌다. 구체적으로 보면, 마약성 진통제 투여에 의한 쇼크사 문제 (간접적 안락사), 심정지와 심폐소생술의 과정에서 나타난 인공호흡기와 인공영양공급에 의존하는 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 환자에 대한 연명 의료중단의 문제가 발생한다(광의의 소극적 안락사). 이 ‘광의의 소극적 안락사’ 사례를 흔히 존엄사라고 한다[3]. 즉 존엄사는 본래 소극적 안락사에 포함되지 않지만, 개념을 확장하여 넓은 의미의 소극적 안락사로 사용한 것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중단은 협의의 소극적 안락사, 의학적으로 무의미하지 않은 연명 의료중단을 존엄사 또는 광의의 소극적 안락사라고 분류하는 것이 정확하다.
1980년대 이전 형법 문헌에서는 존엄사와 ‘광의의 소극적 안락사’를 같은 개념으로 정확하게 다루고 있었다[4]. 그런데 이 존엄사라는 용어가 보라매 병원 사건 이후 ‘사기에 임박하여 곧 사망할 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연명조치의 포기, 유보, 중단’을 의미하는 ‘협의의 소극적 안락사’와 같은 개념으로 혼동되어 쓰여왔다[5,6]. 언론들은 이제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 용어를 반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용어 사용의 혼란은 언론의 잘 못이 먼저인지 언론에서 잘못된 정보를 습득한 사이비 전문가들의 책임이 먼저인지는 불분명하다.
3. 연명의료결정과 환자의 자기결정권, 의사의 임무
헌법재판소, 대법원 모두 임종환자에게만 연명 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왔고 [7,8], 이 논리는 연명의료결정법에 그대로 반영되어 연명의료결정법도 임종환자에게만 사전의료의 향서, 연명의료계획서 등의 효력을 인정한다. 즉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연명의료의 중단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임종환자만 가진다고 본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란 무엇인가? 이는 헌법상 ‘생명·신체에 대한 불가침권’에서 파생되는 권리로,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상병 상태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듣고 그 정보를 기초로 의사의 침 습행위를 승낙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9].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의료행 위의 구조상 환자가 먼저 의사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적응증에 따라 의사가 필요한 의료행위를 결정하고 그 의료행위를 거부할 것인 지를 결정하는 권리이다. 우리 법질서가 임종환자 에게만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할 권리를 인정하고 임종기 이전의 환자에게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환자는 거부하는 의료행위를 강제로 받아야 하는 법질서의 불쾌한 요청이 된다.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환자의 상태와 무 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 점은 독일의 경우 국가윤리위원회, 연방의사협회, 연방대법원 모두 일 관되게 인정한다[10,11].
반면 의사의 임무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면서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며, 고통을 덜어주고, 죽어가는 환자일 경우에는 사망할 때까지 곁에서 돕는 것이다[12]. 의사의 생명유지의무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언제 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하라는 요구 역시 의사의 직업적 양심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무의미하다는 것 역시 가치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지만 최소한 임종환자의 경우는 연명의료가 무의미하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고, 무의미한 의료행위는 애초에 환자의 자기결정 대상이 아니다[13,14]. 오히려 임종환자의 경우 연명의료가 아니라 환자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의사의 임무에 속한다. 그래서 임종환자에 대하여는 의학적 판단에 따르고, 임종기가 아닌 환자에 대하여는 환자 본 인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라고 하더라도 의식이 있다면 환자의 의사를, 의식없는 환자라면 가족 등의 의사를 충분히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다[15]. 만약 임종환자에 대한 연명의료중단이 본인이나 가족 등의 동의가 없을 때 형법적으로 살인죄가 문제가 된다면,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가 법적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원했다면 살인죄가 촉탁·승낙살인죄로 바뀔 뿐이고 가족 등의 의사에 따랐다면 의사에게 그대로 살인죄가 되고 오히려 가족 등은 살인죄의 공범이 될 뿐이다. 임종환자의 경우 형법적으로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 보증인 의무가 없으므로 살인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의 경우 비록 환자가 의학적으로는 생명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의료행위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한다 [16]. 의사가 환자의 의사에 반하여 의료행위를 한 경우 그 의료행위가 의학적으로 필수적이고 그 의료행위로 환자의 생명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의사는 형사처벌 대상이다.2)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환자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외국의 통상적인 입법례는 임종환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임종환자는 환자가 연명의료를 원한다고 결정하더라도 연명자체가 불가능하다[17]. 그렇다면 우리 연명의료결정법의 사전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 계획서는 연명이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의료 거부 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인가.3) 대한민국에서 연명의료에 대하여는 임종환자가 되기 전까지 환자의 모든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은 없다. 그러면 반대로 의식이 명확한 환자 본인이 거부하는 의료행위를 강제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환자는 본인이 거부하는 의료행위를 강제로 받아야 할 의무는 있는가? 있다면 그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그러한 의무를 인정한다면 법적으로 “살아야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데, 우리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살아야 할 의무를 도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는 동안 국가와 사회에 의무를 지는 것이지 국가와 사회에 살아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18].
국가가 절대적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임종환자가 되어야만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인정한다면 낙태와 관련된 출산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만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적인 것이다.4)
4. 죽을 권리가 아니라 치료거부권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자살할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생명·신체에 대한 불가침권’에서 도출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연명의료를 거부함으로써 그 반사효과로서 죽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법적 권리가 아니다. 1986년 독일법률가대회의 발제문 “죽음에 대한 권리?”라고 쓴 제목 뒤 물음표는 “죽음에 대한 권리는 없다”는 의미다[3]. 이러한 의미에서 환자는 ‘소극적 자살권(das Recht auf Selbstt?tung)’을 갖 는다[14]. ‘생명·신체에 대한 불가침권’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대해 가지는 소유권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 타인이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권리는 포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사조력자살은 직접적인 자살할 권리, 즉 자신의 생명에 대한 처분권을 인정해야 의사조력자살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촉탁·승낙 살인죄와 자살관여죄를 처벌하는 현행 형법의 입장에서 보면 쉬운 일은 아니다. 의사조력자살을 언급하면서 스위스의 예를 들지만, 스위스에서 의사조력자살이 가능한 이유는 다른 특별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법에서 우리나라와 달리 자살관여죄는 원칙적으로 불가벌이고, 이기적인 동기로 관여한 경우에만 처벌한다(스위스형법 제115조). 독일도 자살관여죄는 오랫동안 불가벌이었다가 몇 년 전 ‘자살의 상업적 지원’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처벌하는 규정(독일형법 제217조)을 신설하였다. 원칙적으로 자살관여죄가 불가벌인 이유는 헌법상 자살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범인 교사범과 방조범은 정범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정범이 스스로 자살하는 사람이고, 자살을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범도 처벌하지 않는 형법의 공범종속성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일과 스위스 형법이 자살의 공범에 대한 가벌성과 관련하여 개입을 자제하는 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형법이다[20]. 그와 달리 자살관여죄를 예외 없이 처벌하는 우리 형법에서 독일과 스위스의 예를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5. 나가며
환자의 상태와 관계없이 의학적으로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경우 의사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환자 자기결정권의 핵심이다. 하지만 현행 연명의료결정 법에 따르면 임종환자가 아니면, 예컨대 PVS 환자나 말기환자 등도 연명의료중단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연명의료결정법의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다. 모든 의료행위가 무의미한 임종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은 없다. 즉 무의미한 의료행위를 거부할 권리는 환자 자기결정의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의사의 직업적 양심과 자유에 속한다.
임종환자가 아니라도 헌법상 보장되는 권리, 본 인이 원하지 않는 (연명)의료 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윤석과 결론을 같이 한다. (임종기 이전) 말기환자의 치료거부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법제에서 의사조력자살의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의료비 부담 때문에 연명의료중단을 요청하는 사례가 없도록, 의료비 걱정 없이 진정하게 자유의사로 연명의료 지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법제를 완성하는 것이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는 국가의 우선적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