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임상윤리(clinical ethics)에서 무엇을 교육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임상윤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임상윤리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1997년 한국의료윤리학회가 창립된 이후 2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이 물음을 묻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과대학에서 임상윤리 교육에 대한 정치한 논의와 합의가 그동안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3년부터 의사 국가시험에 의료윤리 문항이 출제되었고, 오늘날 거의 모든 의과대학이 의료윤리 교육을 하고 있는데도 그렇다[1]. 의과대학 교육(기본의학교육)뿐 아니라 전공의 교육인 졸업 후 교육이나 보수교육이라고 일컫는 기성 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2018년 1월부터 의사는 연 8평점의 필수평점을 이수하게 되었는데 그 중 의료윤리가 필수과목으로 포함되었다.1) 그렇지만 그 내용의 충실성이나 교육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으며,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는 만족스러운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한 편으로는 임상윤리, 혹은 의료윤리란 무엇인가2)에 관해 의사집단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 전반에서도 의견의 일치, 또는 합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 것이다. 많은 이들은 ‘윤리적’인 의사를 임상에서 겪는 윤리적 갈등 사례를 합리적으로 잘 해결 하는 전문가라기보다는 ‘환자에게 헌신적인, 마음이 따뜻한’ 의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의료윤리뿐 아니라 윤리 전반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윤리’를 가장 중시하는 나라 중 하나에 들어갈 것이다. 그 근거 중 하나는 「인성교육 진흥법(법률 제13004호, 2015년 1월 20일 제정)」의 존재다. 이 법에 의하면 “인성교육”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3)을 말한다. 그리고 그 “핵심 가치·덕목”이란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됨과 관련되는 핵심적인 가치 또는 덕목”4)을 말한다. 물론 이 법에서 의미하는 인성교육은 유아교육기관이나 초·중등교육 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의미하지만, 인성(人 性)과 윤리(倫理)를 동일시하는 태도는 비단 이들 학교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윤리교육은 곧 인성교육이고, 이는 의료윤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8년 장정 숙 의원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최근 의료인의 비도덕적 진료행위와 관련해 분노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의료인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안타깝다”며 “국가고시를 단순 면허취득 시험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의식이 투철한 ‘인술의’로서의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 인성면접 도입을 통해 이 같은 우려를 해소할 의사가 있는지 국시원을 상대로 그 여부를 질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2]. 즉, 의료인의 비도덕적 행위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윤리 의식이 없는, 한마디로 인술의(仁術醫)로서의 준비가 되지 못한 의사들 때문이며, 따라서 국가시험의 “인성면접”을 통해 이를 걸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단지 한국회의원의 개인적 소견이 아니라 많은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그 결과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의사국가시험 인성면접평가 도입 타당성 및 실행방안연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예상한 대로 “인성면접 평가를 의사 국가시험에 도입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전문가의견수렴 결과에서도 타당하지 않으며 실행가능하지 않다.”였다[3]. 이 해프닝은 윤리를 곧 인성과 동일시하는 한국적 정서와 문화의 뿌리 깊은 영향을 잘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윤리, 즉 독립적인 개인(independent individual)이 담지하는 정체성 (identity)으로서의 충실성(integrity)5)과, 계약 (contract)으로서의 인간관계에서 중시하는 정직 (honesty)과 신의(trust)의 중시는 아직 도래한적 이 없고, 윤리, 또는 도덕이라는 단어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여전히 전통 유교 문화에서 유래한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인본주의(人本主義), 그리고 인술(仁術) 등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들이다. 일부 현대적인 단어로 바꿔 표현했지만, 그 본질은 분명하다. 그러니 「인성교육진흥법」과 같은 법률에도 “예와 효의 중시”와 같은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이 소고에서는 이렇듯 혼미한 상황 속에서 한국적 임상윤리의 내용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가르치지 않아야 할 것인지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이는 단지 임상윤리의 내용(contents)뿐 아니라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의료의 실천(medical practice)이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인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아니 이 둘은 애초부터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이 글에서는 강조하고자 한다.
Ⅱ. 본론
우리나라에서 의료윤리를 최초로 논한 것은 1969년 대한의학협회지(현재의 대한의사협회지)에 실린 김사달의 논문 “近代醫療制度와 倫理觀”이다. 김사달 선생은 여기서 의사의 윤리관으로 “인간 하나하나의 생명을 더없이 존귀한 것으로 여기는 기본적인 인격 형성”과 “의사와 환자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인간관계의 확립”을 들었다[4]. 이는 장정숙 의원의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의식이 투철한 인술의”와 일맥상통한다. “생명을 존귀한 것으로 여김”은 유교의 ‘仁’에서 유래하였고, “삶을 중시하고 죽음을 슬퍼(重生哀死)”한다는 유교의 관념과도 연결된다. 예컨대 송대의 유학자 주 돈이(周敦 , 1017~1073)는 창문 앞의 잡초를 뽑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잡초가 살려는 의지나, 내가 지닌 살려는 의지나 모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5]. 이렇듯 작은 생명 하나도 함부로 해치지 않는 것이 유교의 인 (仁)사상이다.6)
“의사와 환자의 부드러운 인간관계”는 결국 人 倫의 세계에서 환자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惻隱之 心) 및 환자에 대한 예의 바른 태도(禮)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쉽게 가부장적 간섭주의(paternalism)로 떨어질 수 있으며,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고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머뭇거리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임상윤리적 갈등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어쨌든 많은 이들은 “윤리의식이 투철한 인술의”는 “인성교육”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인성(人性), 또는 인성교육(人性敎育)이라는 표현 역시 사람(人)은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天命) 도덕의 본체인 성(性)을 내재하고 있다는 유교의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性은 곧 우주의 도덕적 원리인 리(理), 혹은 도(道), 또는 인(仁)인 것이며, 이것이 없다면 사람은 사람이라 볼 수 없고, 금수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질 수 있다. 심신을 잘 수양하여 인간 기질의 혼탁함(氣質之性)에 가려진 이 본연의 성(本然之性)을 회복하는 것이 전통 유교의 기획이었던 것이다. 즉 “인성교육”이란 배움(學)7)의 근본적 목적이자 형태로서, 전통 유교가 인간의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던, 몸과 마음을 닦아 완성된 사람(君子)에 이르고 자 하는 기획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설파하는 윤리, 도덕, 혹은 인성이라는 단어들은 전통 유교의 영향에 깊숙이 물들어 있는데, 우리는 다만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전통 유교에서 유래하였다고 믿어지는 가부장적 사고나 남녀차별, 신분제, 조상 숭배나 제사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그래서 마치 이 땅에서 근대가 다 도래한 듯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인격이 아닌) 생명이 존엄하다”, “사람이 (돈보다) 우선이다”, “약자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惻隱之心)”, “도덕이나 윤리는 교육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의 도덕과 윤리를 계몽해야 한다” 등과 같은 명제는 실상 전통 유교에서 유래하였지만, 우리는 이들을 마치 당연한 절대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있다.8) 실은 한 도덕 공동체(a moral community)에서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이란 특정 형이상학 체계, 특정한 도덕 체계, 특정 인간관과 사회관 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유교다.
한편 의료윤리나 임상윤리는 일반적인 윤리·도 덕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의사라는 특정 직업과 결부된 직업윤리라는 점도 이 사안을 복잡하게 만든다. 조선으로 대표되는 전통 사회에서는 직업 윤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직업’이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을 의미한다. 오로지 가치 있는 ‘직업’은 농사(農者天下之大本)였고, 선비가 가질 수 있는 직업도 기껏 농부였다. 사실 선비가 글을 읽고 교육을 하고 정치에 종사하는 일은 ‘직업’ 이 아닌 일종의 자원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했다.9) 공장(工匠)이나 상인은 농부보다 훨씬 못한 존재였는데, 공장은 생활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이나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자신이 구입한 물건에 이문을 붙여 파는 상인은 그보다 더 사악하기 때문에 사기꾼과 다름없다고 보았다.10)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이렇게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도 뚜렷하게 존재해본 적이 없었는데 의사가 의술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밀집된 인구집단(도시)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던 소수의 의술을 아는 자들은 국가가 고용해서 활용했기 때문인데11) 이는 다른 기술직, 즉 수학자나 천문학자(陰陽士), 통역사(譯官), 법률전문가(律士)도 마찬가지였다. 장인(工匠)들도 대부분 국가가 고용해서 생산직에 종사했고, 조선 후기까지 독립적으로 물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민중은 아플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고, 의서(醫書)를 읽은 유학자(儒醫)들이 도움을 주기는 하였는데, 이들은 물론 처방이나 치료에 대해 돈을 받지 않았다. 유의라면 아픈 사람이 있을 때 마땅히 무료로 구제해 주는 것이 도리였던 것이고, 진료를 하고 돈을 받는다면 이는 경멸받아야 마땅한 인간에 불과했다. 조선 후기에나 상업과 도시가 성장하면서 사설 진료를 하는 약종상이나 전통 의사 등이 등장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돈을 받고 진료를 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독립적인 개인 간의 가상적 계약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사회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전통 유교에서 바라보는 사회란 가족이 확대된 것이다. 가족(家)의 윤리는 바로 사회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된다. 즉, 아버지에 대한 효(孝)는 바로 임금에 대한 충(忠)으로 연결되며, 형제간에 있어야 하는 서열(序) 역시 사회 일반의 서열로 이어진다. 부모나 형제간에 필요한 질서(人倫)는 정의나 평등, 신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자 애와 공경의 상호작용이며, 여기서는 특정인이 자신의 위치나 분수(分殊)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의에 입각한 평등한 인간관계 같은 것은 별로 설 자리가 없다. 모두가 한 가족(同 胞)이라면 누가 아프면 마땅히 돌봐주어야 한다.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식의 계약은 존재할 수 없으며, 환자-의사 관계는 서비스와 대가를 주고받는 계약관계가 아니라 여유 있는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시혜(施惠)의 관계로 여겨지게 된다. 그 결과 직업적인 의사의 존재가 확인되는 조선 후기 이래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의료윤리 쟁점” 중 하나는 “돈이 없는 환자를 무상으로 치료해 주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물론 대가를 치르고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가 난한 이들도 의료의 혜택을 받아야 하고, 이는 역사적으로 종교 기구의 몫이었다. 즉 기독교나 이슬람, 불교 모두 선교와 시혜 등의 목적으로 구휼 기관과 병원을 세웠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까지 대비원(大悲院)은 도성에서 빈민 환자를 구료하는 국가 기구였으며, 여기서 일한 이 들은 승려들이었다. 불승들은 개인, 혹은 교단 차원에서 빈민 환자 구료에 종사하였으며, 이는 대 비원이 억불숭유 정책으로 말미암아 활인서(活人 署)로 이름을 바꾼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세 이후 서구에서는 사설 개업의(private practitioner)가 등장하면서 교회나 도시 정부가 설립한 병원 등과 공존하였는데 비해 우리는 그러한 역사가 매우 짧다. 그 결과 중세 이후 서구에서는 교회 기구나 도시 정부, 혹은 지배층 인사(자선 가)의 책임이었던 “빈민 환자 돌보기”가 이 땅에서는 의사의 윤리(혹은 인성)를 갈음하는 척도가 되었고, 그 반향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다.12)
또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유교의 부정적 유산 중 하나는 매사를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고 어떤 절대적 도덕원칙(理)을 들이대어 옳고 그름을 시 비(是非)하기 좋아하며, 도덕 문제에서는 반드시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믿음이다. 사회의 공리(功 利)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공리(公理)13)가 더욱 중시되고, 효용(效用)을 위한 타협은 회색분자의 비겁함으로나 보인다. 도덕의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가 되고, 어떤 결정이나 정책이 사회공동체의 공리(功利)를 확보하는 데 더 유리할까 하는 정치적 질문이, 누가, 혹은 어떤 세력이 더 공리(公理)에 가까운가, 즉 더욱 도덕적인가로 대치되는 현상이 왕왕 벌어진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건전한 근대의 도덕 원칙은 초월적인 도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독선과 독단으로 쉽게 왜곡된다.
예컨대 COVID-19 유행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묻게 된다. “인공호흡기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면 회복 가능성이 있는 환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전형적인 임상윤리의 질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정직하게 답하기는커녕 의제로 제시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먼저 백신을 맞아야 할까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자원이 무한한 이상적인 상황에서라면 ‘필요한 누구나’가 중환자실 치료를 받아야 하며, 역시 ‘모두가 평등하게’ 백신을 맞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항상 제한된 자원을 두고 결정을 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런 이상만을 고집한다면 합리적인 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윤리, 또는 도덕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reasoning) 방식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우리에게는 윤리란 깨달음의 문제이고, 시비(是非)를 가려야 할 문제이지 따지고 계산하는(ratio) 문제가 아니다. 옳은 것은 항상 옳고, 그른 것은 항상 그른 것이지 무슨 타협을 보고 관용할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 ‘도덕’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14)
뷔첨과 칠드레스의 소위 생명윤리 4원칙이 널리 유행한다 해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의료윤리, 또는 임상윤리의 이름으로 가르친다[6]. 하지만 그 함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아직까지 없는 듯하다.
우선 자율성 존중의 원칙(principle of respect for autonomy)이 있다. 그런데 자율성이란 근대적 개인(individual)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근대적 개인이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주체이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개체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개인이 있는가? 아마도 우리에게는 사람 존중(respect for human)이나 생명 존중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을 과연 중시하는가는 의문스럽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은 가족이나 민족, 국가나 공동체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다. 대한민국 국민은 예전에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국민교 육헌장)”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감성이 풍부하고 더불어 사는 사람(2019 개정 누리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7].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 앞에 우선하며, 공동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에 대해 회의를 표시하는 개인은 설 곳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자의로 포기하기도 불가능하다. 개인의 생명을 지극히 존중하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 보전을 자신의 의무로 자임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된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개인이 계약을 통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멀고 먼 태고의 조상 때부터 한 핏줄, 한 겨레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하는 민족 공동체라고 다수 국민은 생각한다. 게다가 형식적으로나마 봉건시대를 벗어난 지 한 세기도 채 안 되었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는 그보다 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분단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근대화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이 땅에서 국가의 형성(nation building)은 여전히 진행 중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과 자율성,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이기주의’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된다.15)
실제로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자율성은 존중을 받고 있는가? 의식이 온전한 성인 환자에 대해서도 의사는 대부분 법정 대리인이라 보기도 어려운 ‘보호자’들과 상의하고 결정하며, 의사가 권하고 환자가 원하는 치료도 건강보험공단이 인정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심지어 환자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데도 그러하다. 진단하기도 어려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아니라면 연명의료를 중단시킬 수 없으며,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의 종류도 역시 국가가 법으로 제한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자율성이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우리나라 의료에서의 자율성, 또는 자유로운 선택은 원하는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을 무제한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른바 윤리 원칙들도 마찬가지다. 해악금지는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선으로 간주하지 않는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윤리의 원칙이 된다는 말인가?16) 오로지 선행의 원칙(principle of beneficence)만이 합당한 윤리 원칙으로 여겨질 것이다. 정의의 원칙은 더욱 난감하다. 롤스(John Rawls)의 주장을 배경으로 하는 정의의 원칙은 공정(fairness)을 정의와 동 일시하는데[8], 롤스 식의 공정은 대한민국에서 정의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공정이나 형평(equity)과 같은 개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며, 이 땅에서 정의란 절대적 평등, 혹은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자유와 평등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 대한 논의는 별로 있어 본 적이 없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이나 편견, 당파성 앞에서 쉽게 왜곡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는 대표적인 근대의 자유 중 하나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공서양속(公序良俗)’이라는 이른바 ‘윤리’ 앞에 쉽게 굴복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때로 극단적인 사고 실험이 필요한 의료윤리학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 윤리학은 어쩔 수 없이 세속윤리(secular ethics)다. 칸트로 대표되는 의무론은 신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된 근대에서 종교적 계율 없이 인간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살 수 있을까를 탐구한 결과이며, 영미 공리주의 역시 신앙과 종교적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정치사회적 옳음(good)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를 고민한 결과였다. 서양의 근대 윤리학이 신학이 붕괴한 자리에서 발생하였다면, 현대 한국의 윤리는 철저하게 비판하고 성찰하여 극복했어야 할 전통 유교의 영향 아래, 주체적인 근대화를 하지 못했던 역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까 이른바 인성교육 담론이 여전히 유행하고, ‘예와 효의 중시’가 도덕적 역량으로 법에 명시되는 것이다. 근대적 직업관도, 전문직의 개념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의사의 전문직 일탈 행위들이 모두 인성의 문제가 되고, 그 해결책으로는 초등학생들도 다 알만한 내용을 “법정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이수를 하게 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근대 이후 인간의 행위를 교정하는 방법은 푸코의 표현대로라면 “감시와 처벌”일 것인데[9], 이 땅에서는 ‘도덕적 비난과 교육’이고, 깊은 숙고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된 정치적 올바름이 예전의 리(理)나 예(禮)를 대치하고 있다. 심지어 정치인들은 그 열기를 ‘입법화’하겠다고 애를 쓰며, 그 와중에 사적 도덕이나 공적 윤리의 문제는 모두 법으로 처벌해야 할 범죄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용이한 것은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불법이고, 저렇게 하면 합법이다.” 이만큼 명료하고 평가가 쉬운 교육도 없다. “환자에게 동의를 받을 때 이러저러한 사실을 빠뜨리거나 설명을 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주의 의무 태만으로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도 물론 필요하다. 의대생이나 전공의, 의사들이 감옥에 가거나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는 일을 예방하는 것도 임상윤리 교육의 일차적 목적일 것이다. 구체적 의료행위와 관련된 법들도 상당히 많다. 「의료법」,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생명윤리법)」, 「호스피스·완화의료및임종과정에있는환자의연명의료결정에관한법률(연명의료법)」, 「첨단재 생의료및첨단바이오의약품안전및지원에관한법률 (재생의료법)」,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장기이식법)」, 「혈액관리법」,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모자보건법」, 「감염병의예방및관리에관한법률」 등이 직간접적으로 임상진료(clinical practice)와 관련되어 있고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으면 불법과 과오를 저지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임상윤리는 관련 법규의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임상윤리 교육의 목적은 적어도 기본의학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장차 마주하게 될 임상 현장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윤리적 갈등 사례를 잘 해결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좋은 진료(good practice)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임상윤리교육을 법교육과 동일시하다 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데 그중 하나는 현행법상의 불법행위가 윤리적으로는 오히려 옳을 수 있다는 딜레마이다. 예컨대 연명의료 중지 등의 결정을 위해서는 가족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지만, 실제 환자의 의사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현재의 동거인은 법적인 가족이 아닌 예도 있다. 때로는 가족의 이해관계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 아닐 수도 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의사를 임상윤리 딜레마에 빠뜨리고, 법의 존재 자체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사의 전문직 윤리는 때로 실정법을 넘어서서 최선의, 혹은 좋은 진료(best or good practice)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던진다. 의사 집단의 전문직 자율성(professional autonomy)이 확보되어 있다면 임상윤리 교육의 여지는 더욱 넓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법으로 재단한다고 하면 윤리가 설 자리가 매우 좁아진다. 1997년의 소위 “보라매병원 사건”은 이전까지 사법이 침투하지 않았던 의료 영역의 상대적 자율성이 종말을 고했음을 표시했다. 의료 전문직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의사들은 최선의 노력을 했고, 심지어 환자의 부인에게 치료비가 없으면 몰래 도망가라는 언질까지 주었다. 그들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 사안의 최종 판결을 사법부에 맡기지 않고 본인들이 내린 것이었다 .
그러므로 의사는 임상윤리 교육을 통해 윤리-법적으로 추론하는 능력(ethico legal reasoning)을 습득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진료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윤리적, 법적 함의를 파악하고 최선의 결정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자신이나 환자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 정도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윤리적 함의와 법적 함의가 충돌하는 경우들과 함께, 그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 필요가 있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환자의 안전과 자신의 안전이며, 그것 이 위협을 받을 경우의 해결책도 알아야 한다. 사법 당국에 대한 제소도 그 한 방법이며, 의료기관, 혹은 의사단체는 그런 의사들을 도울 수 있는 기구와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의료윤리위원회나 임상윤리자문제도의 운영 등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기구의 운영을 위한 표준운영지침, 그리고 이런 기구가 의존할 수 있는 전문 직 표준(professional standard)으로서의 임상윤리 지침(clinical ethics guideline) 또는 표준진료지침 (practice guideline) 등이 각급 의사단체별로 제정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율적 노력을 통틀어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이라고 부른다. 즉 의사의 임상윤리 역량은 곧 전문직업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준수하느냐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추론 능력은 사례를 바탕으로 하는 연습을 통해서 연마할 수 있다. 기본의학교육에서는 평범한 의사가 임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윤리 사례들을 가지고 교육해야 하는데, 그래야 학생들이 나중에 유사한 사례를 마주쳤을 때 유추(analogy)를 통해 이를 풀어갈 수 있다. 이 표준적인 사례의 해결은 판례, 그리고 각종 관련 지침 등이 되어야 하고 물론 정답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정답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불법’이 아니라면 윤리적 결정은 허용 가능한 것부터 허용이 어려운 것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적 표준(professional standard)과 본인의 양심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해서 결론을 내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를 위해 교육용으로 쓸 수 있는 표준화된 사례를 더 많이 개발해야 하고, 그에 대한 법적, 윤리적 분석을 담은 교과서와 교재들을 더 많이 발 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집필하고 실제로 활용 할 수 있는 임상 지식과 법적, 윤리적 감각을 함께 갖춘 유능한 교육자들도 양성할 필요가 있다.
한편 졸업후 의학교육과 보수교육에서는 매우 현실적이고 까다로운 사례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기본의학교육에서 다루는 사례들이 흔히 발생하고 표준적인 답을 결정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 (examplar case)라면 졸업후 의학교육과 보수교육에서 다루는 사례들은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때로 답이 없는 사례들이 될 것이다. 이를 혼동하면 곤란한데, 임상사례와 마찬가지로 기본의학교 육에서는 흔한 증상과 질병을 토대로 표준적인 접근법을 가르치며, 전공의 교육과 이후 보수교육에서는 때로 증례보고(case report)감이 될 수 있는 까다로운 사례들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다. 임상윤리교육은 딜레마 토론 방법처럼 딜레마에 대한 상이한 시각을 명확하게 드러내어 인지적 불균형을 만든 다음 이를 통해 인지발달 단계를 높이려는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임상윤리교육은 임상 교육과 마찬가지로 법률과 각종 지침, 윤리적 추론능력을 동원하여 최선 내지 차선의 결론을 탐색하는 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임상의학 지식이 때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임상의학 지식을 습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학습자들은 임상윤리 사례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사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와 의견, 관련 법률이나 지침의 취지, 각종 윤리 이론들, 그리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하면 사례가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결국 임상윤리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사례 그 자체이다. “구체적인 임상사례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 모듈을 개발하는 것은 교육자에게 확신을 부여하고 내용을 구체적이며 깊이 있게 만들 것이다.[10]”
Ⅲ. 결론
임상윤리의 이름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거나 가르치고 싶지 않은 내용도 있다. 각종 의료윤리 이론, 윤리학이나 철학의 여러 이론, 여러 종교의 생명관이나 생명존중 사상 등은 전문가들에게 필요하고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기본의학교육에서 깊이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국의 각종 법규나 지침 등은 철저히 우리 문맥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데, 우리 법은 물론 의료계의 관행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국의 법규나 지침 등을 그대로 가져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종종 목격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법규나 지침과 다를 경우 결과적으로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 교육자들은 자신이 속한 국제 학회의 지침이라 해도 우리 진료 관행이나 의료 문화와 다르다면 그 함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료 시술에서 십대 후반 미성년자의 동의 문제 등이 그 한 예이다.
소위 “인성교육”의 이름으로 예술이나 체육 등을 가르치는 것은 리더십이나 커뮤니케이션 교육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임상윤리와는 별 관련이 없다. 리더십이나 커뮤니케이션은 전문직업성 발달에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인성(人 性)’은 아니다. 한편 의사라면 모를 리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 즉 “일회용 주사기를 재활용해서는 안 된다.” 등을 “임상윤리”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는 감염과 환자 안전이라는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고, 이를 모 른다면 의사가 될 자격이 없다. 몰라서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육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알고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책은 교육이 아닌 상응하는 처벌일 것이다.
임상윤리는 윤리학이 아니라 임상진료(clinical practice)의 일부로서 ‘좋은 진료(good practice)’를 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 - 윤리적 민감성과 관련 지식을 통한 추론능력, 그리고 도덕적 용기 - 을 기르는 것이다. 좋은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표준(professional standard)에 근거하여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즉 법규나 지침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정당한 예외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의대생, 혹은 임상의사에게 교육하는 임상윤리는 윤리학 전문가의 업무인 “임상윤리학”도 아니다. 윤리학 전문가는 온갖 이론을 연구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하지만 기본의학교육과 그 이후 과정에서 임상윤리 교육의 내용은 철저하게 현실에서 임상의사가 겪는 사례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이론적으로 충분히 규명이 어렵다해도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정도의 판단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구미 사회와 달리 이 윤리적 아노미 상태의 현실에서 윤리학의 매끈한 포 장도로가 닦일 날은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임상 윤리학 전문가라면 잡풀을 뚫고 그럭저럭 다닐만한 오솔길을 내는 것으로도 충분한 소임을 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