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정윤석(이하 저자)은 논문 ‘필수의료의 위기와 의학전문직업성’에서 한국의료가 직면한 위기를 “철학 없는 보건의료정책의 불합리성을 박리다매, 3분 진료로 버티던 의사들이 비급여 진료라는 워라밸 높은 분야로 쏠리게 된 점, 여기에 ‘빅5병원’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한 의료전달체계의 붕괴, 실손 보험으로 인한 환자와 의사들의 도덕적 해이가 기름을 부은 형국”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보건의료 정책 측면과 의학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 측면에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측면 모두를 중시하는 저자는 논문에서 후자에 초점을 두고, 이를 고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제시되는 기존의 ‘지침화’의 규범 윤리는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최소치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지향할 이상(ideals) 제시에는 취약하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대안으로 윤리의 이상을 추구하는 ‘긍정 윤리’(positive ethics)를 제안한다.
본 논평은 의학전문직업성을 회복하려는 기존의 ‘지침화’ 방식의 한계를 저자가 부정확하게 분류하여 실효성이 약한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비판한다. 본 논평은 의학전문직업성을 강화하고 의료인의 윤리의식을 고양하려는 방안으로 ‘덕성 중심(virtue-based)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 구축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2. 윤리 실천을 위한 윤리 층위 구분과 협업
저자는 기존의 의학전문직업성 논의가 “지침화, 규범화”의 지침 중심이었다고 제대로 파악하면서도, “금지와 제재”의 부정적 표현이 주도적인 지침을 “각종 선언과 윤리강령, 4원칙 등 원칙 중심의 규범 윤리”라고 잘못 분류함으로 긍정적 표현 주도적인 ‘긍정 윤리’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실수를 범한다. 규범 윤리는 어떤 행위가 옳은지 또는 그른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아닌지, 혹은 어떤 성품이 좋은 성품인지 아닌지 등의 윤리 문제를 규칙(rule or principle)이나 덕성(virtue) 등으로 이론화하는 윤리 논의이다. 규범 윤리는 학문적인 차원에서 규범의 원리나 토대가 무엇이냐에 따라 크게 의무론(deontology), 공리주의(utilitarianism), 덕 윤리(virtue ethics) 등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규범 윤리에는 부정적인 표현의 금지뿐만 아니라, 저자가 ‘긍정 윤리’라고 표현한 이상 등의 내용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긍정 심리학적 토대에서 제시되는 ‘긍정 윤리’는 긍정적인 표현과 관련해 덕성 함양을 강조하는 덕 윤리에서도 볼 수 있다[1]. 긍정 윤리는 규범의 토대나 원리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내용의 표현 방식이 긍정적인지 아니면 부정적인지의 구분과 관련되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저자가 ‘지침화’라고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표현 방식이 부정적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의학전문직업성을 통해 추구하려는 윤리 의식 고양이 취약하다는 점일 것이다. 왜 ‘지침화’ 중심의 의학전문직업성 논의가 윤리 의식 고양에 취약할까? 그리고 어떻게 실효성을 높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 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 용어가 다양한 층위에서 다른 목적과 의미로 제시된다는 윤리의 세 층위 구분 논의를 살펴보자.
실천과 관련된 주제들을 논의할 때 윤리 용어가 ‘이론 윤리 층위’, ‘제도 윤리 층위’, ‘개인 윤리 층위’의 세 층위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에 윤리 용어를 사용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어떤 층위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며, 다른 층위와의 협업을 통해 제대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3]. ‘이론 윤리 층위’는 학문적 차원에서 윤리를 논의하는 층위이며, 이 층위에서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 이론들은 강조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1인칭 관점의 규범성(normativity), 2인칭 관점의 관계성, 3인칭 관점의 보편성이 통합되어 있다[4]. 예를 들어, 생명의료윤리 영역에서 대표적인 저서인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도 초판부터 8판까지의 개정 과정에서 1인칭 관점의 덕성 논의, 2인칭 관점의 도덕적 지위 논의, 3인칭 관점의 원칙 중심 논의가 통합적으로 체계화되면서 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5]. ‘이론 윤리 층위’는 다른 층위들의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층위들로부터 현실성 있는 이론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제도 윤리 층위’는 사회적으로 시급한 윤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하고 특정한 지침과 규정, 또는 강령 같은 3인칭 관점의 보편성을 표현하는 내용들을 제시하는데, 이 내용들은 주로 ‘이론 윤리 층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의사 윤리 강령, 윤리 지침, 윤리 헌장 등으로 제시되는 윤리들이 ‘제도 윤리 층위’의 사례이다. ‘개인 윤리 층위’는 개인들이 윤리 실천을 도모하게 하는 동기 부여(motivation)와 관련된 가치관, 세계관, 신념 등과 관련된 1인칭 관점의 규범성과 관련된 층위이다. 이 층위 또한 ‘이론 윤리 층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제도 윤리 층위’로부터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윤리의 범위를 제공받는다.
윤리의 세 층위 구분 방식을 현 논의에 적용해 보면, 저자가 부정적인 윤리 내용을 담은 ‘지침화’로 분류한 기존의 윤리 규정과 강령은 ‘이론 윤리 층위’의 규범 윤리라기보다는 규범 윤리의 내용을 ‘제도 윤리 층위’에서 소극적으로 지침화한 규정들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1) 더욱이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긍정 윤리’ 또한 3인칭 관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제도 윤리 층위’에 속한다.2) 다른 영역이지만 인공지능 윤리 영역에서 분석된 기존 논의에 따르면, 인공지능 윤리가 ‘제도 윤리 층위’에서 많이 사용되어 수많은 강령과 지침 등이 제시되었지만, 실질적인 윤리 실현과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6,7]. 왜냐하면, 윤리 강령과 지침은 추상적인 원칙이어서 구체적인 행위지침(action-guiding)으로 나타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천을 도모하는 동기 부여 구조 자체를 결여하고 있어 규범성 내재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 윤리 층위’를 윤리의 전부로 이해할 경우, 윤리가 실천 도모에 취약하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윤리의 세 층위 구분에 따르면, 윤리 실천과 실현을 위해서는 3인칭 관점의 보편성 중심으로 제시된 지침이나 강령을 자신의 의무로 규범화하고 동기부여하는 1인칭 관점의 ‘개인 윤리 층위’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저자가 ‘지침화’에도 불구하고, 윤리 실현이 잘 되지 않는 현상을 보고 대안으로 제시할 것은 또 다른 지침에 불과하거나 우연적으로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긍정 윤리’가 아니라, ‘제도 윤리 층위’의 지침과 강령을 1인칭 관점의 규범성으로 본질적 차원에서 내재화하고 동기 부여하는 ‘개인 윤리 층위’의 윤리여야 한다.
3. 덕성 중심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
저자는 의료인들이 의학전문직업성의 윤리 의식을 함양하고 실천하게 하고자 한다. 저자는 과거에는 이런 의학전문직업성이 어느 정도 의료인들 사이에 공유되었지만 최근에 약화된 것을 우려하며 ‘긍정 윤리’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앞에서 분석한 것처럼, 제대로 된 대안은 또 다른 지침이거나 우연적으로 실천을 도모하는 논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1인칭 관점의 규범성에 토대를 둔 ‘개인 윤리 층위’ 논의로의 전환이다. 이에 대해 과거에는 ‘개인 윤리 층위’ 강조 없이도 윤리 실현이 도모되었기에, 이러한 전환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과거에는 의료 영역에서 명시적인 1인칭 관점의 ‘개인 윤리 층위’를 주목함 없이 ‘제도 윤리 층위’의 윤리 지침과 강령만으로도 윤리 실천이 가능했던 것은 의료 영역에 내재한 전문직 문화가 의료인들에게 어느 정도 내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의사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는 높은 윤리적 행위에 대한 기대치와 의료 전문직 문화로 인해 1인칭 관점의 규범성이 가치관과 신념으로 작동했던 것이다[8]. 따라서 ‘개인 윤리 층위’에 대한 강조와 주목 없이도 윤리 강령이나 지침과 같은 ‘제도 윤리 층위’만으로 전문직 문화에서 구현되는 윤리 실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는 이런 전문직 문화가 약화되거나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 윤리 층위’의 지침과 강령은 더 이상 윤리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제시되는 기존의 교육은 윤리가 강제와 억압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조장하기 쉽다[8]. 따라서 전문직 문화가 약화되거나 부재한 상황에서 윤리 실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1인칭 관점의 규범성을 내면화하고 동기부여하는 ‘개인 윤리 층위’의 윤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의학전문직업성의 윤리 의식 고양을 위해 ‘개인 윤리 층위’에서 제시할 만한 윤리 모델은 무엇일까? 본 논평은 과학자들의 덕성 함양을 목적으로 제시된 ‘과학적 덕성(scientific virtue) 모델’에 따라 ‘덕성 중심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을 구축하자고 제안한다[9,10]3). 과학적 덕성 모델은 과학 연구와 관행이 윤리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전제 아래, 과학자들의 덕성 목록을 구성하여 이를 워크숍 교육을 통해 강화하고자 한다.4) 과학적 덕성 모델은 1단계 과학적 덕성 목록 제시, 2단계 과학적 덕성 교육 방법 모색, 3단계 과학적 덕성 교육 워크숍 실시로 구성된다. 1단계의 과학적 덕성 목록은 과학자들이 갖는 목표로서의 가치가 전문직 덕성(vocational virtue)으로 나타난다는 이론적 토대 아래 5년 동안 모범이 되는 미국 과학회(National Academy of Science) 연구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해 과학 연구자 1,100여 명과 대면 또는 전화 인터뷰, 온라인 설문조사 등의 경험 연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 등의 이론 연구가 협업하여 과학적 덕성 목록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제시된 목록의 10개 핵심 가치는 정직, 호기심, 인내심, 객관성, 증거에 대한 겸손, 주의 깊음, 회의주의, 용기, 협동심, 정확함이었다. 2단계 과학적 덕성 교육 방법은 참여자들의 성향이나 교육 여건에 따라 응용할 수 있도록 이론 중심, 모범 중심, 개념 중심의 세 가지 방식이 모색되었다[11]. 이론 중심 방식은 과학적 덕성을 체계적인 이론 중심으로 제시하는 것이고, 모범 중심 방식은 특정 과학적 덕성을 실제로 보여주는 인물을 탐구하는 것이며, 개념 중심 방식은 개별 과학적 덕성 자체를 고찰하게 한다. 3단계 과학적 덕성 교육 워크숍은 참여자들에게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여 실시되었다. 개념 중심의 교육 방식을 적용한 과학적 덕성 모델은 한 번의 워크숍에서 2개의 덕성 개념을 1개의 개념에 각각 45분 동안의 개념 중심 교육을 진행하여 참석자들의 덕성 함양의 효과를 입증했다[12].
과학적 덕성 모델을 따라 덕성 중심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을 구축하려는 것은 두 모델 모두 전문직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료인 또한 과학자처럼 진리를 발견하는 연구 활동도 하고 있어서 양자의 관련성이 깊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덕성 모델을 그대로 의료 영역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전문직 덕성과 의료인의 전문직 덕성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자의 문화와 환경 또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5) 의료인 덕성 목록은 이론 연구와 경험 연구의 협업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사례가 될 만한 몇 가지 이론 연구를 살펴보면, 의료인에게 가장 근본적인 덕성은 돌봄이라는 분석이 있으며[13],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은 악의 없음, 정직함, 인테그리티, 양심적임, 믿음직함, 성실함, 감사하는 마음, 진실성, 애정이 깊음, 친절함 등을 도덕적 성품으로 제시하고 있다[14]. 이러한 이론 연구들을 토대로 의료인들에게 인터뷰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의료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의료인의 모델은 누구인지,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등을 조사하여 의료인 덕성 목록을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덕성 목록들을 가지고 적절한 교육 모델에 따라 정기적으로 의료인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한다면 의료인의 덕성 함양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오는 글
필수의료의 붕괴와 같은 한국 의료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현시점에 논문 ‘필수의료의 위기와 의학전문직업성’은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회적으로는 의대 정원 증가, 수가 인상, 필수의료기관 네트워크 형성 등의 보건의료 제도와 정책 모색에 치중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러한 정책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반드시 의학전문직업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방안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본 논평은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대안 모색에 있어서 약간의 수정을 통해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본 논평은 의학전문직업성을 확립하여 의료인의 윤리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1인칭 관점의 규범성을 강조하는 ‘개인 윤리 층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인 윤리 층위’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델로 ‘덕성 중심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을 구축하여 실질적인 교육에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과학적 덕성 모델이 실질적 효과를 학문적으로 입증한 것처럼, ‘덕성 중심의 의료인 윤리 교육 모델’이 구축되어 실행된다면 한국의료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