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최근 안규백 의원 외 12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조력존엄사법률안’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의사 조력자살의 법제화 논의가 촉발되었다[1]. 위 법률안과 관련하여 고윤석은 ‘우리 사회의 의사조력자살 법제화’라는 논문에서 현장 경험이 많은 의료인으로서의 균형 잡힌 시각과 함께 주목할 만한 우려 사항을 지적하고 있고, 법제화를 위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다.
고윤석은 명확하게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에 반대하고 있다. 반대하는 이유 또한 매우 설득력 있고 타당하다. 필자 역시 현재 단계에서의 의사조력자살 법제화에는 반대하며 그 이유 또한 고윤석이 제시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고윤석의 입장과 논거를 검토하면서, 필자는 왜 동의하는지, 나아가 보완하여 제시될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밝힐 것이다.
그런데 고윤석은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 반대 외에도 현행법의 개선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가 적어도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지금과 같은 임종기가 아니라, 말기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고윤석이 의사조력자살에 대해 제시했던 우려의 논리와 논거가 이행시기의 확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이행시기의 확대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하고, 자기결정권 행사의 오남용이 방지될 수 있는 대안 마련이 함께 논의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아울러, 필자는 고윤석의 논문에 담긴 쟁점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을 포함하여 생애 말기 의료적 처치의 유보나 중단 문제와 관련된 현재의 논의가 어떤 문제점을 가졌으며, 이런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지적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의사조력자살 그 자체의 윤리적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나 의사조력자 살은 윤리적 측면에서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보이는 문제임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떤 윤리적 이론 검토가 이루어지 더라도 서로 다른 이견을 밝히는 입장을 불식시켜 버릴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논증은 아직 출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법제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사례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법제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시각은 존 애라스(John Arras)에 의해 분명하게 제시된 바 있다[2]. 그는 설사 의사조력자살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같이 의료보험제도에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는 법제화가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즉 ‘자기결정권 행 사’라는 미명하에 발생하는 권리 행사의 오남용을 충분히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의사조력자살의 오남용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아가, 과연 우리는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를 말기로 확대할 때 발생하는 오남용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원칙이 실현되기 위해 어떤 것들이 갖추어져야 하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II. 의사조력자살에 반대하는 고윤석의 입장과 논거 분석 및 보강
고윤석은 ‘우리 사회의 의사조력자살 법제화[3]’에서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와 관련하여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쟁점을 “임종 방식과 시기를 선택할 환자의 권리”, “연명의료결정법의 일부 개정 한 형태로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안”, “의사조력자 살을 보조하는 의료 행위의 정당성 여부”, “의사 조력자살 수행에 대한 의료계의 대비”, “연명의료 결정법의 보완이 의사조력자살 논의보다 선결과 제”, “좋은 죽음 논의를 위한 기구의 필요성” 등 쟁점을 여섯 가지로 나누고, 각각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논거를 제시한다. 순서대로 그 쟁점에 대한 입장을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1)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 논란에 대하여 고윤석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자의임종 방식에 대한 바람이 존중받으려면 대상 및 방식과 시기 등에 대한 사회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의사조력자살은 환자의 온전한 자기 결정권의 영역이 아니라 조력해야 하는 상대측과 협의가 필요한 협의 결정권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고 주장한다.2)
필자는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환자의 결정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고윤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울러, 의사조력자살은 “조력해야 하는 상대측” 즉 의료진과의 협의가 필요한 협의 결정권 영역에 있는 문제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환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해당 요구를 수용 할 의료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설사 의사조력자 살이 법제화된다고 하더라도 법제화의 내용은 의사조력자살에 동의하지 않는 의료기관이나 의료인까지 강제적으로 시행하도록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사의 양심에 따른 처치는 환자의 자율성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행위가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여 법제화되었더라도 그 행위는 의사의 양심을 거스르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의료윤리의 쟁점들은 윤리적 허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인 경우가 많다. 윤리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해당 행위를 윤리적으로 강제한다는 것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권장된다는 것도 아니다[4]. 법제화는 언제나 강제적 시행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행위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절차를 통해 해당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지 규율하는 것이 윤리적 허용 가능성과 관련된 쟁점에 대한 법제화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고윤석은 “의사의 도덕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환자의 자율성도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라고 언급한다.3) 하지만 앞선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사조력자살이 “협의 결정권 영역”에 있는 사안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보아, 고윤석은 이 논란이 진정 해결하기 어려운 논란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고윤석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은 사실 단순하다. 필자는 이런 경우 의사는 자신의 인테그러티를 해치면서까지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 급한 것처럼 이 문제는 윤리적 허용 가능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환자의 요구가 의사의 양심과 충돌하는 경우, 해당 의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환자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다른 의사를 안내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의 합의’이다. “조력해야 하는 상대측과 협의”, 즉 자기결정권 행사를 수용하고자 하는 의사와의 협의에 앞서, 우리는 해당 행위를 윤리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어야 한다. 하지만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는지 의문이다. 나아가, 고윤석이 주장하는 연명의료 유보 또는 중단의 이행 시기 확대와 관련하여 우리가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고윤석은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뜻에 따라 무익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으로 그 행위의의 도가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4)라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조력존엄사’법안을 연명의료결정법에 덧붙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독립된 법안으로 발의되고 검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5) 필자는 앞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이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담아 발의된 법률안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고 별칭이 ‘조력존엄사법률안’이다. 하지만 현행법인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은 입법 목적이나 입법 과정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안락사 개념과 분리하여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을 법제화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윤리적 측면에서는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와 거의 유사하게 취급되는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이 법률안을 현행법의 일부개정법률안으로 발의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본다. 일부개정법률안으로의 발의는 현행법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지 발의자들이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의사조력자살을 ‘조력존엄사’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존엄사’라는 매우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부적절한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윤석은 덧붙여서 “사회가 합의하려면 환자의 관점에서 본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인식 및 욕구 조사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에 대한 사회 인식도 파악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6) 필자는 이 제안이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고윤석은 ‘존엄사’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면서 “의사로부터 임종을 유도하는 약물을 처방받아 환자 스스로 복용하여 임종에 이른다면 존엄이라는 가치를 내포한 ‘조력존엄사’란 용어보다 ‘의사조력 자의임종’이라 하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의사조력자살보다 순화되어 들린다”고 주장한다.7)
필자는 ‘존엄사’라는 용어는 당연히 비학술적 용어임을 강조해 왔다[5]. 왜냐하면 자연사도 ‘존엄사’로, 의사조력자살도 ‘존엄사’로 지칭되어 혼란 이 발생할 수 있으며,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 역시 환자에 따라 다른 것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윤석은 “의사조력자살은 치유자로서의 의료인의 역할과 상충이 되며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 될 수 있다”고 말하며,8)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아울러 고윤석은 의사조력자살의 요청에 대해 “의사마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고통 및 조력 의료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9) “담당의사로서의 어려움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환자가 온전히 자 유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바람대로 의사조력자살을 요청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도 있다. 실제 온 전한 자율성의 실현은 여러 요인들과 충돌하게 된 다”고 담당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10)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윤석은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해당 판단이 진짜 자율적인 판단이었는지에 대한 숙고가 전제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도 이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해당 결정이 자율성을 위장한 강압적인 결정은 아니었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숙고를 우리 의료계가 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여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고윤석은 “임종 돌봄을 위한 사회 기반 시설과 지원 제도와 담당 의료인들의 진료 수준은 좋은 임종 돌봄의 중요한 요건이다”라고 주장한다.11) 아울러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지적한다.
“2016년 1월 8일에 연명의료결정법이 국회 본 회의를 통과하고 6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호스피스 돌봄 이용이 가능한 질환은 암, 후천성면역결 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호흡부전, 만성 간경화에 국한되어 있다. … 진료비에 대한 부담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치료 중단의 중요한 요인이다.”12)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윤석은 아직도 경제적 부담이 치료 중단이란 위장된 자기결정권 행사의 실질적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논의가 시 의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우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사조력자살이 강요된 선택이 될 수 있음에 대한 대비책이나 보완책을 우리는 마련하고 있는가? 고윤석은 ‘의료계’라고 언급하고 있지 만 사실 대비책 마련은 의료계만의 문제라기보다 정부의 의료정책, 보험정책, 복지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윤석은 “환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여러 제한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와 삶을 잘 이해하는 제3자에게 결정권을 양도하여서도 작동될 수 있다”는 견해도 피력한다.13) 그런데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제18조에서 미성년자의 결정을 친권자가 대리결정하는 규정, 제17조에서 자율성 존중이란 가치 아래,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는 방식 중 하나로 가족의 2인 이상의 의견 일치, 제18 조에서 최선의 이익에 따른 결정으로서 가족 전원의 합의 방식만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고윤석이 지적하듯이, 환자가 미리 제3자를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윤석은 소위 “대리인 지정제도”가 고려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고윤석은 “적법한 대리인을 배우자와 직계 가족 등의 가족관계들로만 한정한 것은 제고되어야 한다. 비록 직계 가족이 아니더라도 환자가 원하는 의료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연고자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그 대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14)며 의료대리인 지정제도의 도입과 무연고 자에 대한 의료기관윤리위원회의 결정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 역시 지정 대리인 제도가 도입될 필요성이 있고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구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6]. 아울러 현장에서 문제가 되는 무연고자에 대한 입법 불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현장에서 문제가 지적된 바 있고, 최근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도 특별위원회를 운영하며, 이 문제에 대한 권고를 준비 중이다.
고윤석은 “이런 국가적 윤리 쟁점들은 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국가 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의 논의도 필요하다. 제2기와 3기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연명의료 결정 제도를 추진하였었다. 최근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를 보건복지부 산하 위원회로의 변경을 추진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의사조력자살 등과 같은 생명윤리 사안은 보건복지 부만의 영역은 아니다”라며 범부처의 기구가 설치되어야 함을 주장한다.15)
위 인용문에서의 핵심은 범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이 가능한 위원회 운영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2013년 7월에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권고’를 발표한 바 있다[7]. 필자는 이 권고를 연명의료 결정 제도의 추진과 관련하여 생명윤리에 관한 기본 정책 수립이라는 본연의 업무를 잘 수행해 낸 주목할 만한 활동이라고 평가한다.
Ⅲ. 현행법의 연명의료 유보 또는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 제안과 관련하여
현행법이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원칙을 천명하고 있지만, 연명의료결정법의 한계로 인해 이 원칙은 현실에서 충실히 실현되고 있지 않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의 유보와 중단을 이행하는 시기를 임종기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말기에 법이 정한 연명의료와 동일한 처지를 유보 하거나 중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말기에 이행되는 유보나 중단이 처벌의 대상이 될지 허용의 대상이 될지는 법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유보는 말기부터 이미 이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보’라는 행위의 성격에 부합한다.
그런데 만약 자기결정권이 진정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숙고하여 결정한 환자의 의사는 그것이 말기이든 임종기든, 그것이 유보이든 중단이든,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존중하고 있기에 비록 이 법의 제1조 목적 조 항이나 제3조 기본 원칙에서 자기 ‘결정’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연명의료결정법은, 해외 국가들이 생애 말기에 시행하는 생명의 유지와 관련된 치료의 유보나 중단과 관련된 정책과 비교하여, 대단히 보수적인 법이다. 대부분 국가는 임종기가 아니라 말기에도 생명의 유지와 관련된 치료의 유보 나 중단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이런 보수적인 법제를 가지게 된 것일까?
첫째, 연명의료결정법은 당시의 사회적 합의에 기초하였고 그래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동의가 있었다. 둘째, 법원은 김 할머니 사건을 통해 안락사와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을 개념적으로 구분하면서 후자는 자 연사의 시기를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이기에 허용가능하다는 입장을 판시했다[8]. 셋째,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특별위원회의 입법 권고 역시 이러한 대법원 결정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 입법을 권고하였다[7]. 넷째, 우리나라는 생애 말기 돌봄 시스템이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아 이 시스템의 강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기결정권의 충분한 보장이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본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의 입장이 바로 위와 같으므로 고윤석이 제안하는 이행시기의 확대는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의 중대한 입장 변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가 시기상조임을 주장하는 고윤석의 논리와 논거는 곧바로 고윤석이 제안하는 연명의료의 유보 또는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의료계는 임종기와 말기를 구분하는 의학적 기준이 엄밀하게 마련되기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해 왔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말기 ‘진단’과 임종기 ‘판단’이란 용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임종기는 ‘진단’이 아니라 ‘판단’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라면 왜 굳이 진단도 어려운 임종기에만 존중하는지 의료계가 의문을 품는 것에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감을 넘어서서 사회적 합의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의학적인 판단에만 맡겨진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의 유보나 중단이 갖는 의미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이행시기의 확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확대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이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제도 개선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연명의료결정법이 기초했던 사회적 합의를 변경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행시기의 확대가 매우 예민한 문제인 이유는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을 허용하게 했던 이전의 사회적 합의, 즉 자연사는 허용하고 안락사는 반대한다는 합의에 큰 변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8]. 말기에 생명과 관련된 처지의 유보나 중단은 그것 이 죽음의 시기를 앞당기고자 하는 경우 학술적으로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별된다. 먼슨(Munson)에 따르면 안락사는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9]. 환자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 비자발적이 구별되고, 행 위의 성격에 따라 적극적, 소극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생명의료윤리학의 영역에서 유의미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안락사는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 자발적인 소극적 안락사, 비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와 비자발적인 소극적 안락사이다. 또한 누가 이행하느냐에 따라 자기 이행과 타인 이행으로 먼슨은 안락사를 구분하고 있다.
위에서 유의미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안락사가 범주적으로는 살인이란 행위로 분류되더라도, 그리고 변형형으로서 의사조력자살이 범주적으로는 자살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윤리적으로 허용된다는 주장이 있으며, 나아가 그 행위의 법제화가 허용된다는 주장이 진지하게 논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형태의 행위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위와 같은 학술적인 구분에 따르면,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이 말기로 확대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러한 중대한 변화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고윤석이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가 ‘사회의 합의’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논 리이다.
나아가 고윤석이 제안하는 이행시기의 확대가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때에만 말기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인지,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가족의 결정에 따라 말기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인지 구별하여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는 자발적인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지 비자발적인 소극적 안락사까지도 허용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윤석은 자기결정권 존중에 부합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순수한 대리결정은 제외하고, 즉 연명의료결정법 제18조의 가족의 합의는 제외하고, 제17조의 가족에 의한 환자의 의사 추정까지는 인정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에 의한 환자의 의사 추정은 현재 아무런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사실 이렇게 매우 약화된 기준을 수용했던 것은 이행시기가 임종기였기 때문이라 본다. 낸시 크루잔(Nancy Cruzan) 판례에서 알 수 있듯 이, 가족은 이해상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해당 법원은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는 기준으로 명백하고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를 요구했었다[10]. 따라서 이행시기의 확대를 논의할 때 환자의 의사 추정은 어떤 기준에 따라 진행될 것인지도 반드시 검토되어야 한다.
필자가 제시한 안락사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적 구분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정서적 반감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안락사’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도 이미 도덕적으로 범주화된 판단, 즉 ‘안락사는 어떤 경우이든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판단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례를 들어 논의하는 경우에는 허용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라는 명칭이 붙으면 동일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는 견해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급식관 중단을 요구하는 경우 학술적 분류로는 이것 역시 소극적 안락사의 한 유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급식관 중단이 정당화된다는 견해를 밝히면서도 일체의 소극적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모순된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안락사나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에 대한 논의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선판단과 개념적 혼동에 빠져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런 이유에서 ‘안락사’라는 학문적 명칭을 사용하기보다 행위의 특징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유형을 거론하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런 입장 때문에 고윤석이 ‘자 의임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필자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임종’이란 죽음에 임하는 것인데 여기에 ‘자의’ 즉 ‘자발적’이라는 용어를 덧붙임으로써, 고윤석은 순화된다고 생각했지만, 필자는 오히려 개념적 혼란만 가증시킨다고 본다.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의사의 살인이란 행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자의임종’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의 쟁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 문제의 쟁점은 의사의 살인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느냐이다. 생명의료윤리학에서 안락사가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환자의 요청에 의한 의사의 살인이 또는 환자의 치료거부를 통해 사망시점을 앞당기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가가 논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논쟁이라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일치되는 하나의 윤리적 판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전문가처럼 이해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비록 학술적인 분류로는 이런저런 유형의 안락사 범주에 포함되는 행위이지만, 그 행위에 대한 시민들의 판단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형적 사례를 통해 그것에 대한 시민들의 판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유형적 접근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소극적 안락사의 범주가 매우 넓다는 것이다. 필자는 소극적 안락사 일체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것은 문제의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처치를 유보하거나 중단한다는 것인지에 따라 시민들은 매우 상이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의료적 처치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경우라도 그 처치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매우 상이한 성격의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고윤석이 제안하는 것처럼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의 이행 시기가 말기까지 확장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상이한 처치의 유보나 중단에 대해 시민들이 어떤 의사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의사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 결과를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분석에서는 과연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유보나 중단인지 우리나라의 의료상황에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우선적으로 나누어본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응급상황에서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을 유보 하는 것은 유보를 이행하는 자가 보증인적 지위에 있는 경우,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법학계에서는 보증인적 지위에 있는 자의 작위와 부작위의 구별은 법적으로 유의미한 구별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철학계에서는 죽게 내버려 둠과 죽임 즉 살인 사이에 윤리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임스 레이첼스(James Rachels)가 논증한 바 있다[11]. 나아가 레이첼스가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적극적인 안락사에 반대한다면 소극적인 안락사에도 반대해야 하고, 소극적인 안락사에 찬성한다면 적극적인 안락사에도 찬성해야 한다는 것, 즉 논리적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법학계와 철학계의 일치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두 학계가 주목했던 사례는 치료의 유보나 중단이 거론되는 사례 중 매우 특수한 사례였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처치 든 그것의 유보나 중단이 적극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과 항상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가 의료적 처치의 유보와 중단과 관련된 여러 유형을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일반화가 지닌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적어도 응급상황에서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시행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유보하는 것은 레이첼스의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 구별의 무의미성이, 그리고 법학계의 작위와 부작위 구별의 무의미성이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응급상황에서의 유보가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응급상황에서 이미 전개된 인공호흡기를 중단하는 것은 당연히 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판단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반론적으로는 적어도 응급 상황이라고 판단된다면 유보나 중단은 사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점에서 POLST(Physician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는 응급상황에는 적용 되지 않는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6].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을 말기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에는 응급상황은 제외하고, 해당 처치가 필요한 상황의 도래를 기저 질환의 진행 추이를 통해 예견할 수 있고, 환자가 그런 경우 자신의 자 발적인 의지를 통해 유보나 중단을 요구한 경우에 그 결정을 존중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이 경우,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처리되길 원하는 사람들에 게는 그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접하는 상황이 응급상황 인지 예견된 상황인지 불명확한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필자는 이런 경우에는 일단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일단 시행 한 후 응급상황이 해소된다면 다행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경우에는 환자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중단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기 환자가 혈액 투석을 유보하거나 중단하겠다고 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i) 이미 혈액 투석을 받아 오던 환자와 ii) 혈액 투석이 필요하게 된 상황에 처한 환자에 대해 우리는 같은 판단을 할 것인가? 이 유형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생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처치에 대한 유보 또는 중단의 문제이다. 필자는 우리가 접하는 의료적 처치의 자발적인 유보나 중단과 관련 된 논란 중 이행시기를 말기로 확대할 때 매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문제는 바로 이 ‘2)’ 유형의 문제라고 판단한다.
어떤 의료적 처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와 필수적인 치료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대해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현재의 연명의료결정법에서와 같이 이런 처치의 유보나 중단은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에도 부합하지만 환자를 위한 최선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일정 정도 항암치료가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치료적 효과를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환자의 결정을 존중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해당 의료적 처치의 유보나 중단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필수적인 치료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진정 성을 갖고 거부한다면 그 결정을 거슬러 이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이 수용된다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매우 사소한 의료적 처치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에게 미치는 부담에 비해 치료 효과가 크다고 보는 통상적인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겠다고 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문의 치료거부권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고 쉽지도 않다. 환자가 이런 통상적인 의료적 처치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이유는 특 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명백히 사망을 앞당기고자 하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허용되기 어려운 치료의 유보 또는 중단이라고 결 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런 경우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급식관의 유보나 중단은 당장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에 따라서는 급식관 삽관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기도 하다. 따라서 상이한 윤리적 관점이나 직 관에 따라 급식관 유보나 중단에 대해서는 서로 크게 대립하는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제19조 제2항에서 수분과 영양 공급을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과 관련된 처벌 규정은 없다.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을 말기로 이행하는 경우, 급식관의 유보나 중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논의하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급식관 삽관 역시 의료적 처치 중 하나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필자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 제는 매우 명확하다. 연명의료의 이행시기를 자기 결정권의 존중이란 원칙에 입각하여 말기로 확대하자는 제안은 이 제안이 제출되기 이전에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다양한 성격의 의료적 처치에 대한 유보나 중단을 검토하며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유보와 중단의 차이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차이에 대해 의사들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유보와 중단은 병렬적으로 거론되면서 그 정당화 근거가 동일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필자는 유보와 중단이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다[5]. 왜냐하면 중단은 이미 어떤 처치를 전개한 상황에서 해당 처치를 제거했을 때의 환자 상태를 예측해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하려 할 때, 환자 상태에 대한 예측이 중단의 경우 더 어렵다면 의사는 유보보다 중단에 더 심리적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의사의 입장에서 유보에 의한 환자 상황의 악화는 기저 질환에 원인이 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중단에 의한 환자 상황의 악화는가 시적으로는 중단이란 의사의 행위 때문에 발생했 다고 여겨져 의사는 심리적 부담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경험적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상과 같이 말기에 이행되는 유보나 중단의 문제를 의료적 처치의 성격별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아마도 의료계에서는 현행법의 연명의료에 국한해서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를 고려하는 것이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다시 말해, 필자가 언급한 항생제 거부나 급식관 거부의 유형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원칙에 호소하면서 왜 특별히 위 유형의 의료적 처치만 배제한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명분이라면 의료적 처치의 유형에 따른 구분은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임종기에서 말기로 이행시기를 확대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의료적 판단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행시기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앞서 필자가 거론한 유형별 의료적 처치의 유보나 중단에 대해 의료계와 생명의료윤리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은 어떤 견해를 가지는지 경험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Ⅳ. 이행시기의 확대 이전에 우리가 점 검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
이행시기의 확대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며,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현재 상태 시민들이 해당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고,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해당 사안에 대한 오해나 개념적 혼동이 있다면 이를 수정한 상태에서 시민들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흔히 공론화나 시민 참여 회의 등의 과정은 시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전문적 지식도 일부 필요하지만, 상이한 윤리적 태도가 일정 정도 신념에 기초하여 발생하는 경우, 여러 집단 간의 양방향 소통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퍼블릭 인게이지먼트(public engagement)’를 강조하게 된다. 연명의료의 유보나 중단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시민적 합의가 어떻게 형성될지 조사도 하지 않고 의료계가 먼저 이행시기의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다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의료비용의 문제, 의료진의 부담 등과 같은 문제 때문에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신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 조력자살에 대한 언급을 의사가 먼저 제기한 것이 우려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 보자며, 환자들이나 시민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 던 문제라고 본다. 문제 제기의 주체가 부적절했다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사회적 쟁점이 되어버린 이상, 이제 우리는 왜곡 없이 오해 없이 이 문제에 대해 서로의 상이한 시각과 견해를 토로하고, 공통된 의견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퍼블릭 인게이지먼트가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자료가 반드시 개발되어야 한다.16) 과연 우리는 질병 유형별로 어떤 과정을 거쳐 사망에 이르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가? 이것을 모른다면 과연 충분한 정보에 의한 동의라는 자기결정권 행사의 전제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킨다는 것인가? 질환별로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기결정권이란 명분으로 그 행사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현재 해당 질병 유형별로 어떤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며, 기관별로 어떤 처치를 받으며,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 알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답변할 수 없거나 어디에서 해당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알려 줄 수 없다면 이 또한 우리는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의사조력자살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조차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결국 정부는 연구과제를 통해 위 사안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고, 시민에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자기결정권의 존중이란 것이 어떤 함축을 지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자기결정권의 존중이란 의학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환자의 선호를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가 최선의 이익과 배치되는 판단을 내리더라도 그것이 환자의 숙고 된 판단이라면 그것을 존중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결정권 존중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 잡으려면, 우선 우리는 이 원칙의 함축 또한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자기결정권 존중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기결정권 행사의 오남용을 방지할 준비도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행법에서 이행시기가 확대될 경우 어떤 것들이 보완되고 도입되어야 할지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이행시기가 확대된다면, 예를 들어, 현행법의 연명의료계획서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하다고는 하지만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만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작성 시기가 건강할 때 작성하는 것이지만 크게 오남용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불명료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떤 처치를 유보하거나 중단할 것인지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대체로는 법률에서 언급되는 정도의 처치면, 어떤 처치든 임종기에는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기로 의료적 처치의 유보나 중단이 확대된다는 것은 어떤 처치를 어떤 상황에서 유보 중단하겠다는 것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될 필요가 있고, 그 결정은 또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말기에 이행한다는 것은 의료적 처치의 유보나 중단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앞당기는 문제와 관련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행시기가 확대되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처럼 아주 오래전 건강할 때 작성한 것은 자신의 의학적 상태가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알고 있을 때 작성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기 어려울 수 있다.
어떤 성격의 의료적 처치를 유보하거나 중단하고자 하는 것인지 지금보다는 세밀하게 살펴보며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지 고려하고 어떤 의료적 처치가 자신에게 무의미한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행시기가 확대된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보다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 훨씬 더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요양 병원에서의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비율도 지금보다는 더 증대되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증대를 위한 방안과 지원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사와 함께 작성한다. 따라서 이행시기의 확대는 그만큼 의료진에게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비용을 누가 어떤 재원으로 얼마나 지불할 것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또한 대리결정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도 논의해야 한다. 연명의료계획서는 미국의 POLST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리인의 작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행시기의 확대는 당장 현재와 같은 가족 중심의 대리결정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지, 지정 대리인 제도를 도입할 것인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말기에도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가족이 내린다는 것은 이해상충을 지닌 가족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기 즉 일정 기간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시기에 가족은 의료비용의 부담을 덜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환자의 의사와는 다른 결정을 내리거나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는 대치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는 경우, 환자를 위한 최선의 이익이란 표준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면 수용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현재는 매우 상이한 판단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사회적 합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비자발적인 처치의 유보나 중단의 문제는 더욱더 점검하고 준비할 것이 많다.
결국 이행시기가 확대된다면 의료진은 많은 시간과 인력을 환자나 환자 가족 또는 환자 대리인과 상담하는 데 할애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 의료계는 이런 변화를 수용할 만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의료기관윤리위원회나 병원윤리위 원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임상윤리상담팀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윤리상담과 관련된 기본적인 체계 부터 구축 정비하고, 관련 전문인력의 양성과 질적 향상을 체계 구축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재정은 언제나 부족한 것이니 제도부터 도입하고 재정을 확충해 나가자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재정이 확충되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 누가 피해를 보게 될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 이전 이미 국가생명윤리위원회의 입법 권고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확충은 강조된 바 있다[7]. 하지만 아직도 호스피스는 암환자들이 주요 대상이다. 우리는 암으로 죽는 것이 다른 질병으로 죽는 것보다 더 사회적 혜택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질병별로 호스피스 지원은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 보장의 내용과 보험 급여의 형평성 문제를 살펴보지 않고 일단 급한 대로 제도부터 도입하자는 것 역시 가능한 주장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우리는 누가 피해를 보고 있는지 누가를 불공평하게 대우하는지 알아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서비스에 대한 보장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하면, ‘자기결정권 행사’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선택이 발생할 수 있다.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이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결정권의 존중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남용을 막을 방안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미명하에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는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 하고, 경제적 이유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강요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점검해야 한다. 자기결정권 행사의 오남용을 막을 방도를 마련하지 않은 채, 어떤 제도를 법적으로 도입하자는 주장은 그야말로 탁상공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료거부권이 존중되는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권 존중이 제대로 실현되는 사회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열악한 의료보험 제도 때문이다. 메디케이드(Medicaid)나 메디케어 (Medicare)의 대상자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치료 거부권의 행사란 강요된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암환자가 항생제를 거부하며 사망한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미국의 의료현실을 바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Ⅴ. 맺음말
필자는 고윤석이 제기한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에 대한 의견을 검토하고, 왜 고윤석의 주장이 적절한지 이유를 제시하였고, 필요한 경우에는 필자의 논거 또한 추가하였다. 그러나 고윤석이 제안하는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에 대해서도 고윤석이 의사조력자살에 대해 제시했던 주장과 논거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행시기의 확대를 논의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제시하였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도 무엇이 먼저 갖추어져야 하는지 강조하였다.
결국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원칙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고윤석과 필자가 동의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원칙이 우리 사회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기결정권 존중’이란 미명하에 강요한 선택이 발생하지 않도록, 즉 자기결정권 행사의 오남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것들이 논의되고 어떤 제도가 갖추어져야 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서비스의 확충이란 과제는 아직도 만족스럽게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돌봄 서비스의 확충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 서비스의 확충과 재정 마련이 병행되지 않은 채 거론되는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의 이행시기 확대나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 논의는 우려할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