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질병에 대한 예방, 진단, 그리고 치료와 관련한 의료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암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는 주요 질환으로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총 81,203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27.5%에 이른다[1]. 여러 질병 중에서 유독 ‘암’이 사람들에게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암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이미지, 즉 치료 및 회복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때문일 것이다. 특히, 환자의 질병 상태가 악화되어 외과적 수술, 방사선 요법, 항암 화학 요법, 호르몬 요법 등의 전통적인 치료법에 의한 치료가 불가능하고 환자에게 남은 삶의 기간이 6개월 이내로 예측되는 말기암 진단[2,3]을 받은 환자와 가족들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죽음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상실의 슬픔을 겪게 된다.
죽음이 예측되는 말기암 상황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경험하게 되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은 ‘상실의 예감’, ‘예비슬픔’, ‘예견된 슬픔’ 등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다[4,5].1) 죽음의 과정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인 퀴블러 로스(K?bler-Ross)는 말기 환자의 적응 과정을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 (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다섯 단계로 나누어 제시하고[6], 말기 환자의 가족들 또한 이와 유사한 적응의 단계를 겪는 것으로 보았다. 퀴블러 로스는 모든 사람이 다섯 단 계를 전부 경험하거나 정하여진 순서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상실의 예감’은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 움과 함께 미래의 어느 순간에 경험하게 될 고통, 즉 죽음이라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예감이 가져다주는 슬픔은 실제로 일어날 사건만큼이나 강렬하다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퀴블러로 스는 이러한 상실의 예감을 세상과 이별하여야 하는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환자와 이별하여야 하는 가족들까지도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7,8].
정신과 의사인 린드만(Lindemann)은 1944년에 죽음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환자와의 이별 이전에 가족들이 경험하게 되는 슬픔과 애도의 반응을 ‘예견된 슬픔(anticipatory grief)’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였다[9]. 린드만은 죽음의 위협이 큰 전쟁터에 아버지나 아들, 남편을 보낸 가족들이 가능한 모든 형태의 죽음을 예측하고 미리 애도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예견된 슬픔이 갑작스러운 사망 통지에 대한 정신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있지만 전쟁터에서 군인이 돌아왔을 때 가족들의 재결합을 방해하는 요인도 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예견된 슬픔은 환자와의 사별 이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슬픔과 유사한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가족들이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환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켜 재적응하는과 정으로 이해되었다[10]. 그 이후 예견된 슬픔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나[11], 환자와 가족들의 개인적 특성 및 관계의 정도 등에 따라 예견된 슬픔의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예견된 슬픔과 환자와의 사별 이후에 가족들 이 경험하게 되는 슬픔(post-loss grief) 사이의 관계도 아직 명확하게 보고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12,13,14].
그런데도 말기 환자 가족의 예견된 슬픔은 환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앞으로 발생할 상실을 예측하게 하고, 환자와의 사별 이후의 슬픔을 어느 정도 완화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10].2) 미국에서 이루어진 예견된 슬픔에 관한 연구에서는 1) 환자를 위협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 2) 슬픔, 절망, 분노, 죄책감 등의 정서적 괴로움, 3) 혼자 울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종교에 의지하는 등 가족 본인을 정신적·관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 4) 환자의 회복에 대한 희망, 5)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집중하여 지원, 6)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신체적·감정적 고통, 7)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관계적 손실, 8) 치료를 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준비하는 반대되는 감정의 병존, 9) 환자에게 죽음을 알리고 준비를 돕는 등의 과업 수행, 10) 죽음이 오히려 환자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는 인식을 동반한 감정의 전환이 말기 환자 가족이 경험하는 예견된 슬픔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되고 있다[16].
죽음이라는 상실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말기암 진단에서 부터 환자와의 사별,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환자 가족들이 경험하는 상실과 슬픔, 비탄에 관한 실증적 연구가 체계적으로 수행 되지는 못하였다. 말기암 환자 가족들이 경험하는 상실의 슬픔에 관한 연구는 주로 환자와의 사별 이후에 가족들이 경험하는 애도 반응과 회복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고[17,18], 환자의 죽음 이전에 이루어진 연구는 말기암 환자 본인의 슬픔 반 응 및 죽음 불안, 죽음에 대한 태도 등을 분석하고 있다[4,19]. 또한, 말기암 환자 가족들과 관련 한 대부분의 연구는 가족들이 간병 기간 돌봄 부담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관계적 고통과 소진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져 왔 다[20,21,22,23,24,25,26]. 특히, 가족들 사이의 유 대 관계가 밀접한 우리나라에서는 가족들이 환자의 돌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말 기암 환자 가족들의 요구와 고통을 파악하고 삶의 질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적인 개입이 강조되어 왔다[2,27,28,29]. 따라서 말기암 환자 가족들이 환자와의 사별 이전에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과 부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는 환자의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말 기암 환자 가족들이 경험하는 상실의 슬픔, 즉 ‘예견된 슬픔’이 표출되는 다양한 양상을 질적으로 탐구하여 말기암 환자 가족들의 사별 이전의 상실 경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 최근 말기 환자와 환자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죽음교육에서 죽음에 대한 성찰의 기초로 ‘애도’ 개념이 논의되고 있다[30]. 일반적으로 애도는 환자와의 사별 이후에 경험하게 되는 반응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 환자 가족들이 경험하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은 환자가 죽음이 예측되는 말기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견된 슬픔’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합한 죽음교육의 구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II. 연구대상 및 방법
본 연구는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환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2015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된 심층면접 자료를 다시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서울 및 경기도 지역 소재 대학병원 및 호스피스 병원에 게시한 연구참여자 모집 광고를 보고 연구에의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 들로, 일주일에 3일 이상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돌보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이었다[31].3)
해당 심층면접은 말기암 진단 이후 환자와 가족 들의 치료와 관련한 의사결정 과정 및 환자를 돌 보는 과정에서 경험한 고통, 환자와 가족들 사이의 관계의 변화, 연명의료, 호스피스, 장례절차 등에 관한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환자의 상태가 위중하여 1회의 면담만을 진행하였던 연구 참여자 E를 제외하고, 모두 총 2회에 걸친 면담의 진행 과정에서 연구참여자들은 환자의 죽음을 예측하고 다양한 차원의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갈등을 토로하였다. 따라서 해당 심층면접 자료를 현상학적 연구방법(phenomenological research methodology)에 기초하여[32] 예견된 슬픔이 표 출되는 양상을 중심으로 다시 질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심층면접 이후에 작성된 녹취록을 반복하여 읽으며 세분화하여 텍스트 분리작업을 진행한 후, 분리된 텍스트에서 주제진술 및 중심의미를 찾아 내어 영역화하는 방식으로 분석하였다. 해당 심층 면접 자료는 말기암 환자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는 특정한 시점에 취합되어 환자의 질병 진행 상황에 따른 예견된 슬픔의 변화를 분석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환자와의 사별 이전에 암환자 가족들이 느끼는 슬픔에 대한 분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예견된 슬픔에 관한 앞으로의 연구 및 죽음교육과 관련한 논의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III. 연구결과
말기암 환자 가족들이 언급한 가장 큰 슬픔은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환자의 죽음 이후에 환자의 부재로 가족들이 겪게 될 삶의 변화에 대한 현실적인 걱정이 아닌, 환자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인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과 공포가 여섯 명의 연구참여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 표시는 말 끝이 흐려지거나 말을 할 때 뜸을 들인 것, / 표시는 불필요한 내용 또는 논지와 무관한 내용을 생략한 것, [ ] 표시는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연구진이 어휘를 삽입한 것을 의미한다.)
제일 힘들었던 거는 뭐, 일단 두려움이죠.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수도 있다, 설마 죽을까. 뭐 그런 게 끊임없이 이제 사람 갈등하게 하는 거죠. 내적 갈등 같은 게 좀 심하죠. 그래서 남편 앞에선의 연해야 된다, 항상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되고, 미리 슬퍼하고, 미리 겁내지 말아야 된다. 계속 나 자신을 용기를 주고, 스스로 추슬러야 된다는 부분들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나 혼자 해결해야 되는 부분 이잖아요. 도움을 받을 수 없잖아요.
(연구참여자 C)
연구참여자 C는 환자인 남편의 죽음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두려움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었다. 반 면에, 연구참여자 E는 환자인 남편의 질병 상태와 죽음에 대한 인식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치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죽음을 준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 연명의료와 관련된 결정을 하게 될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있었다.
환자가 힘들게 하면 막 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그럴텐데. 환자가 참 긍정적이에요, 성격이. 그래서 한 번을 괴롭히지를 않아요. 그래서 참 성격도 그렇고. 그래서 자꾸 좋아질 거라고 생각만해 왔고, 이렇게 …… 재발만 안 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생각밖에. 안타깝기만 해요. 요즘에는 환자가 조금 말은 안 하는데, 좀 본인이 힘든 것 같애. 이렇게 자꾸 내가 죽으면, 이란 말을 두 번 인가를 했어요. 그래서 자꾸 …… 자기 자신을 정리를 하는 건가, 걱정이 돼.
(연구참여자 E)
그냥 이 상태로 그냥 나빠질 거라고는. 내가 그쪽 을, 맘을 편하게 먹고 있는건지, 예민하게 그렇게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가 않아요. 지금부터 막 그런 생각하면 더 슬프고. 나도 힘들 것 같고. 그래서 아예 안 해요. 그때 가서 뭐 환자 상태 따라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거 그냥 하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연구참여자 E)
환자인 며느리를 돌보며 동시에 손주들도 돌보고 있었던 연구참여자 F와 환자인 시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던 연구참여자 B도 환자의 죽음을 예측하고 그로 인한 슬픔과 연민을 표현하였다.
아이들 땜에도 힘들지만, 마음이 힘드니까 더 힘든 것 같애. 마음이 즐겁고 이러면서 아이를 보면 들 힘들겠죠. 그런데 한쪽에는 생과 사가 오가고. 막 이런 얘기가 계속 들리고 …… 그니까 일도 막 손에 안 잡히고. 아, 그게 힘든 거 같애요.
(연구참여자 F)
참, 원래 우리 어머니는 좀 되게 불쌍한 인생을 사셔, 사신 것 같은데. 자기 명의의 통장이나 재산도 없는 것 같아. 없으니까 뭐 유언 남길 것도 없다고 하시고. 그냥 고생만 하신 것 같아.
(연구참여자 B)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수용 사이의 간극으로, 환자의 죽음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 낸 연구참여자도 있었다. 연구참여자 A는 환자인 부인의 긴 투병생활로 인하여, 부인과 여러 차례 부인의 죽음 이후의 장례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 누었다고 진술하였다.
우리 처가 또 2002년도에 ○○○병원, ○○○병 원에 시신 기증을 했어요. 왜 기증했냐면은 안식 구가 2002년도엔 암에 안 걸렸을 때거든. 왜 그러냐면은 우리 애들 고생시킨다고./그래서 ○○ ○병원에 시신 등록을 해놨어요. 시신 기증을 갖고 다녀요. 차에 해놓고 있는데, 얼마 전에 의대생들이 왜 막 시신 뼈를 막 가지고 장난치고 칼싸움 하고 이런 게 있었어, 뉴스에. 그 소리 덕에 딱 정내미가 떨어지더라고./내가 딱 질려서 하지 말 자 그랬다고. 하지 말자가 아니고, 나는 해도 좋은데 ○○엄마는 내가 시신기증 안 하고 가족끼리 장례를 치러가지고, 저 화장을 해서 내가 수목장하자, 이렇게 했어요. 우리 마누라가 울더라고. 그 병원 하면, 지긋지긋하잖아요.
(연구참여자 A)
그러나 연구참여자 A가 집에 다니러 간 사이에 부인을 찾아온 문병객들이 부인에게 죽음과 장례 절차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 연구참여자 A는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모두 ‘말기암’이라고 하는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질병 상태에 놓인 환자의 불 행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였다.
가끔은 왜 젊은 것이 아파서 왜 이렇게 힘들게 할 까 하다가도, 그거를 또 원점으로 가고 불쌍하고 …… 이겨내겠죠, 잘 이겨낼 거 같은데 한쪽으로는 또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고.
(연구참여자 F)
살아 있으면 되지 뭐, 이제. 라고 …… 또 마음의 위로를 하고. 모든 걸 내려 놓고 …… /엄청 마음, 정신 쪽으로 힘들고 치료 방법이 없다니까. 근데, 휴 ……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게 너무 아프잖아요.
(연구참여자 E)
연구참여자 A는 환자인 부인이 오랜 투병 기간 겪었던 신체적 고통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긴 투병 기간이 오히려 부인을 더욱 불행하게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불쌍합니다, 이 세상에서요, 암환자같이 불쌍한 사람들 없어요 …… 10년 살았다고요? 20년 고통, 30년 고통이 더 따르는 거에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아까 이야기했죠? 갑자기 죽는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나 그 터득했어요. 나 그 터득했어. 다른 사람들은 안 됐다 그러지요, 말로는 그렇지. 나는 실제 터득한 거에요. 마누라가 옆에서요 아파서 뒹굴뒹굴하고 기저귀 차고 남편 몰래 기저귀 차고 갈을라 할 때, 그거에요. 안 겪어본 사람은./말도 못해요. 괴로움? 어떻게 말로 다합니까. 산에 가서 엉엉 울죠, 막. 아휴.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들은 특히 병원에 검진 또는 치료를 받으러 가기 직전에 느끼는 심리적 불안과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정을 언급하였다.
그럼 또 항암 검진 받으라 그러잖아요. 이삼일 전부터, 그럼 또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거에요. 내일 모레가 인제 그런 날이다. 그런 것들이 또 전이됐나, 어떻게 됐나, 이게 어디에 또 다른 부위에 잘못됐나. 지도 못 자고 나도 못 자는 거에요, 잠을.
(연구참여자 A)
이렇게 얘기를 하다보면, 마음에 엄습했던 불안이 사라지기도 하고. 계속 반복을 하는거죠. 반복을 하면서 가는데, 아까도 잠깐 말씀 드렸다시피 3주에 한 번씩 병원을 갈 때마다 이번엔 주사를 못 맞는다고 할까, 그게 항상 인제 약간의 불안감은 항상 작용을 하니까. 그게 3주 시한분거죠. 그렇게 진행을 하면서, 그냥 생활을 하고 있어요.
(연구참여자 C)
그래서 에이 별일 없겠지 하고 [병원에 검사하러] 갔는데, 전이가 됐다는 거에요 …… 그래가지고 되게 힘들더라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 그게 좀 오래되고 일이 자꾸 생기고 하니까, 케어하는 사람 자신이 …… 내가 먼저 지쳐버리는거야, 먼저. 내가 지쳐버리게 되고 포기할라고 이런 맘도 들고. 이런 게 좀 힘들더라고.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도 그렇고, 다 걱정만 하고 있는 거에요.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하는데, 나빠지니까.
(연구참여자 D)
연구참여자들은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불 행에 고통스러워하면서 동시에 의료진에 대한 원망을 표출하였다. 의료진에 대한 원망은 의료진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슬픔이라기보다는, 회복에 대한 기대와 달리 점점 악화되는 환자의 질병 진행 과정에서 느끼는 가족들의 절망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의료진이 언급하였던 환자의 질병 상태와 환자의 실제 질병 상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경우에, 의료진에 대한 원망이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 이번에 6개월 진단 나온 후에 괜찮다고 했는데, 6개월 후에 보자 그랬거든요. 그래서 다들 아, 축하한다고, 식구끼리 그랬는데, 그 주부터 아픈 거에요. 근데 왜 거기는 몰랐을까, 의료진은 왜 몰랐을까. 그래서, 그리고 아파서 막 아파서 내가 병원에 가라 그래도 자기 임의대로 하고 병원 안 가고, 그냥 아파도 참아요. 그래서 병원에서 좀 더 며느리한테 더 얼른 찍어봐야 된다,해 봐야 된다, 종용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연구참여자 F)
또한, 연구참여자들은 의료진의 말기암 진단의 통보 방식, 전원이나 퇴원 요청, 치료에 대한 설명 등과 관련하여 불만을 표출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이러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사회적·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들에 대한 의료진의 공감과 배려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들은, 물론 의사 선생님들은 그런 환자들을 보니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그냥, 안 좋아졌네요, 재발했네요. 뭐 하거 하고, 병원에서 또 해줄 수 있는 게, 그냥 항암해야 되겠네요, 뭐 그런 것밖에 없어요. 그런 게, 너무 속상했고. 또 막 우리는 두 가지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두 가지 다 보니까 또 재활하고, 이 소화기 내과 쪽하고 치료를 같이해야 할 상황이 있었어요. 막 이럴 때, 우리는 이제 재활병원에 입원을 해서, 이쪽 치료도 같이 했음 좋겠다 싶었는데, 의사들은 너무 냉정한거야./내가 그 선생님 붙들고, 내가 진짜 …… 사정을 해도, 냉정하게 안 된다고 하는 거에요.
(연구참여자 E)
이제 나는, 그거는 당뇨 합병증이고, 이게 병원 실수는 아니다 라고 이제 나는 얘기하는데, 이제 아버님은 이제 억울하시고, 너무 막 이게 5개월 만에 이렇게. 그 전까지 깨끗하고 아무 이상 없다 그랬다가 전이되었다 그러고. 막 3-4개월, 치료 안 하면은 3-4개월 남고, 치료하면은 1년이다 이렇게 얘기했거든.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고. 병원만 믿고 의지했는데, 이거 막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연구참여자 B)
연구참여자 B는 다른 가족들의 의료진에 대한 원망이 일종의 절망감 표현이라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질병으로 꾸준히 병원에 다녔음에도 암의 진행 상황을 몰랐던 의료진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어떤 분함 있잖아. 어머니가 너무 빨리.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되는 …… 돌리는 것 같아.
(연구참여자 B)
당뇨가 있으면, 근데 좀 양방은 당뇨는 당뇨 따로, 암은 암은 따로. 요렇게 보는 건지, 이제 그런 얘기를 일절 없었고, 당뇨 때문에 뭐 어렵다는 얘기도 일절 없었고. 전체적인 관리를 해주지.
(연구참여자 B)
이러한 의료진에 대한 원망이 분노로까지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 연구참여자 A는 회복에 대한 희망으로 여러 번 반복한 수술과 항암치료에도 환자인 부인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수술과 항암 치료를 권유한 의료진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아, 나는 마, 저게 이때까지 십 년 가까이, 십 년 차에요. 그 가까이 항암치료를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맨 처음에, 병원을 막 몇 군데를 다녔거든요. 옮기다녔는데, 가는 곳마 다 교수들이 하는 소리가 그거더라고. 우리 안식구 짐 수술을 세 번 했어요. 시술 세 번 하고.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처음에는 이 담당 교수들이 다 ‘아 수술 자알 됐습니다, 자알 됐습니다.’ 처음에는 막 살 수 있다는 그런 용기를 막 주는 거에요. 그래야 이 환자하고 보호자들이, 내 생각엔 그래요. 경험에 의해서, 또 주변사람들 말 다 들어봐도, 나하고 똑같은 생각이야. 내 생각엔 아, 이 선생 처음에 막 용기를 갖도록 해가지고 모든 약을 무한정 써도 괜찮겠구나, 하는 그런 힘과 용기를 막 줘요, 살 수 있다는 용기. 그게 결국에는 자기들 장사라고 장사. 항암에만 드가는 게 아니고 어떤 암세포를 죽인다고 이 약을 쳐 봐, 항암제 A라고 쓴다 그러면은 그 A란 약만 들어갑니까. A가 안 좋으니까 또 보호제 들어갔죠, 간 보호제 들어가지, 뭐 또 변비가 생기니까 변비약 먹이지. 완전 이건 장사치 생각이 그렇더라고. 그러고 또 A라는 항암제를 썼으면 안 들으며 요게 또 내성이 생겼다 그러면서, 또 B란 약을 또 쓴다고. 완전히 연구 대상이에요.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 중에서 사업을 하는 60대 남성인 연구참여자 A는 상당히 여러 번 환자의 질병에 대한 본인의 죄책감을 토로하였다.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였던 상황에서 부인과 노력하여 이룬 살림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본인이 부인을 고생시켜서 부인이 암으로 고통받는 것은 아닌지 괴로워하였다.
그러니까 있잖아 말도 경상도 사람들 투박하고, 살아봐라 살아봐라 그랬거든. 그래가 주저앉은 게 35년 살았어요. 맨날 서울로 가자 서울로 가자 그랬거든. 그게 생각해 보면 그때 못 간 게, 못가서 암 걸렸나 …… 나 때매 그랬나? 내가 지한테 모든 걸 너무 많이 맡겨서 그런가?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에요. 그래 그기 인자 가슴이 더 아픈 거에요. 눈물도 못 보이고 화장실 가서 막 틀어놓고 물 틀어놓고 막 혼자 울다가 말다가. 테레비도 크 게 틀어놓고.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 A는 또한 본인이 부인에게 잘못하였던 일 이외에도 본인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하였던 일까지 돌아보며, 환자의 질병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내 자신 지난 일을 내가 엄청 반성을 했어요. 나도 지난 일에 어렵게 커가지고. 내가 ○○에서 중학교 다닐 땐데, 내 친구들이 시계가 차고 다니더라고. 내 친구 우등상 받은 시계를 내가 함 차보고 싶다고, 말없이 갖고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 그 시계를 어떻게 안 돌려줘버렸어. 그게 여태까지 막 마음이 걸리가지고 죽겠더라고.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 A는 결국 몇십 년 만에 동창회에 나가 그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만나서 중학생 시절에 시계를 돌려주지 못하였던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늦게나마 시계값을 건네주었다고 하였다. 연구참여자 A는 이 사건 이외에도 본인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다른 몇 가지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일부 연구참여자들은 환자의 죽음을 예측하며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엄청난 심리적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사회적 고립을 선택하고 있었다.
2014년도 9월 달인가, 10월 달인가, 통증이와 가지고, 항암도 통증이 계속 오는 거에요, 항암을 해도. 막 여기저기 전이되니까. 그래 가지고 내가 못 살겠어서, 마누라 옆에서 아프다 그러면요. 내가 마음이 황폐해지고 막 초조해지고 불안해지 고. 친구들이 전화와 가지고, 어떠냐 니 마누라 어떠냐, 이 말 듣기도 싫고, 전화도 하기 싫고, 다 끊어버렸어 내가. 한 십 년 가까이 되니까 귀찮더라고. 둘이, 마누라랑 둘이만 있어.
(연구참여자 A)
기도하고, 찬양 집회 가고. 그러고 내가 이 타이밍에 정말 거기 교회를 옮긴 게 …… 아, 너무 내가 이렇게 침체되고 이런데, 이게 도저히 이게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그나마 다녔는데. 마음이 마음은 좀 아니어도 갈, 갈 여유가 있었지만. 아, 도저히 못 가겠어서 그래 가지고 그냥 이렇게 도망 좀 도망치듯이 그냥 잠적해버렸지.
(연구참여자 B)
반면에,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는 연구참여자 D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하여 어머니 집으로 매일 출퇴근하느라 신체적으로 소진되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어 사회적으로 위축되어 가는 자신의 상황을 답답해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로하고 환자에게 거꾸로 위로를 받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자와의 관계는 환자와 아직 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예견된 슬픔의 특별한 양상이라고 생각된다.
[환자인] 며느리가 좀 담담해서, 며느리한테 갔다가 내가 좀 위로를 받고 가요. [며느리가] 신앙생활을 해서 그런지.
(연구참여자 F)
그러니깐 막 그 약들 때문에 죽을 것만 같이 힘들 면서도 자기가 그런 의지를 놓지 않는다는 그 정신력이 너무 고마운 거에요. 어떻게 저렇게 의지가 강할 수 있을까 하면서. 저는 남편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고마워서 …… 그런 부분이 고마워서 눈물이 나더라구요./사실 남편을 통해서 제가 용기를 많이 받고.
(연구참여자 C)
연구참여자 A는 환자인 부인이 자신이 먼저 죽은 이후에 혼자 남겨질 남편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 모습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진술하였다.
이 경기도 특유에, 음식하면 우리나라에 전라도 음식, 전주 음식 잘하잖아요? 경기도 음식도 자알 해요. 경기도 음식도 여기 토백이 토종 내려온 그대로. ○○ 있을 때 된장 막 담고, 막 김치 담아가 주는데 있잖아, 사람 살다보면 맛있게 먹어주는. 그니까 자기도 많이 담아가. 된장도 엄청 담아놨어요. 몇 년 먹을 거 담아놨어. 이 사람 딱 보니까 몇 년 전부터 된장을요, 고추장하고 한 5년, 된장은 한 10년 먹어도 될 거 같애, 아마. 우리 김치 냉장고 가득히 해놨어, 벌써. 자기는 내가 죽어도 자기 음식이 길들여져 버렸잖아.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 A도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부인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연구참여자 A와 부인 모두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부인의 죽음을 예측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니까 이 사람이, 김장할 때도 뭐 걱정 엄청하는 거에요. 김장할 때도, 내가 김장 11월 달에 김 장 하거든요. 11월 1일쯤에. 인자 암환자니까 추울까봐 아파트 불 막 화끈화끈 해놓고. 내년까지 살지 안 살지는 모르지만은. 아 …… 이 김치는 맛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내가. ‘아, 이 김치 맛있다! 내년에도 이렇게 담자!’ 슥 쳐다봐요. 그 러면 내년을 또 예약해 놓는 거잖아, 지하고 나하고 은연중에, 그죠. 그러면 이 사람 또 힘이 나가지고 ‘내년?’ 응, 내년. 그믄 뭐 내후년도 이렇게 하자! ‘막 나 이렇게 한다고. 그믄 또 힘이 나. 그래, 알았어!’이라고 또.
(연구참여자 A)
그래서 내가, 내가 막 저거 했잖아. 테레비 안 보고 영원히 저가서 사는 거, 천국으로 이사 간다, 절로 간다, 이런 거를 다 얘기해 줬거든. 어차피 태어나면 죽으러 가는 길이니까 괜찮다 하고, 막 죽어도 괜찮다 그러고. 나도 죽고 먼저가 있으라, 그러고 자기도 죽는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소리 해줘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엄마가 죽을지 내가 먼저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오 분 후에 일을 알 수 있나?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갑자기 죽는 사람 봐라. 나, 그런 사람 물론 진짜 복된 사람인데, 오 분 후에 일도 모르잖아. 하나님밖에 모르잖아. 자꾸 안심시켜줘요. 자기도 알면서도, 알면서도 편한거지.
(연구참여자 A)
연구참여자 B는 환자인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많이 표현하면서, 시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아쉬워하였다.
연구참여자 중에는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인식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환자와 가까운 미래에 사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전과는 다른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많이 단단해진 다음부터는, 그 …… 병이 진행된 처음엔 무서워서 얘기도 안 하고. 내가 괜히 얘기해서 남편을 자극 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그러다 나중에는 좀 단 단해진 다음부터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오 픈하고, 차라리 오픈하고 쉽게 얘기하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에스키모인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죽으면 하루에서 일주일인가 며칠 동안은 그 사람에 대해서 계속 얘기한다고 하잖아요. 즐거웠던 일, 슬픈 일 계속 얘기하면서 마음껏 얘기하고, 울다가 웃다가 그런데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실컷 얘기한 다음에, 그 슬픔을 그냥 털어 버린다 그러더라고요. 감추고, 막 속상하다고 덮 고, 그러지 않는다는 거죠. 저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꾸 그런 부분에 있어서 힘들고 아픈 부분에 대해서 병에 관한 거든, 경제적인 거든, 내 심적인 거든, 신앙적인 거든, 자꾸 밑으로 가라앉히지 말고 다 떠올리자. 다 위로 떠올려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서로 허심탄회하게 그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 하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 그게 훨씬 더 좋겠다. 어느 순간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남편한테 그런 얘길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어요.
(연구참여자 C)
연구참여자 C는 환자인 남편의 질병 상태를 인정하고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황을 어느 정도 극복한 이후에,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을 긍정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연구참여자 C는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편이] 그냥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거, 예쁜 거 하나 구해서 거기다가 유골을, 화장한 유골을 넣어서 책꽂이 같은 곳에 넣는 건 어때? 멀리 갈 것 없이. 그러면은 그냥 기일날 식구들이 간단히 모여서 얘기를 잠깐 드리고, 아니면 밥 한 끼 먹고 그러면 되지 않아? 그걸 굳이 납골당까지 비싸게 돈 내면서 할 필요가 있어? 이러는 거에요. 그래서 집안 책꽂이에 해놓으면 되지 않아? 이런 얘기를 하는 거에요.
(연구참여자 C)
저희 식구 전부가 특히 남편의 병 때문에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깝게 생각하고, 깊이 생각 하던 결과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서로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에요. 그거 그닥 중요하지 않다. 죽는다는 게. 그냥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고, 죽은 다음에 남은 식구들이 어떻게 살다 가고, 그 안에서 결국 하느님을 붙들고 하느님과 관계를 잘 유지하다가 가고. 그게 중요한 거지, 별거 있겠냐. 저희는 식구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너무 쿨한가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닥 …… 그런 얘기를 하는 것조차도 즐거워요. 우리가 병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초점이 삶과 죽음에 있지 않고 하느님한테 있구나. 그런 것들이 참 기뻐요. 즐거워요, 그런 것들이.
(연구참여자 C)
연구참여자 A는 환자인 부인과 사별한 이후의 본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오랜 시간 암환자인 부인을 돌보면서 많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한 연구참여자 A는 부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다른 암환자 가족들이 겪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희망을 진술하였다.
그라고 나는 막, 우리 안식구가 언제 막, 내가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몰라도 계속 일기 쓴 거 봐도 나는, 내가, 나는 내 나름대로 다니면서 암환자 가족들 다독거리주고 위로해주고, 내 이런 걸 하고 싶어요./어떻게 될랑가 모르겠지만은 남한테 봉사하고. 그거 가지고 내가 마음을 천국에 가야겠다, 천국이 있다는 확신을 가져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안식구하고 하게 됐어요. 우리 안 식구가 죽는 거 별거 아니다 해가지고 장례, 니가 죽고 내가 죽으면 이렇게 이래서 정리를 한 거에 요./○○엄마 천국 가거든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지 봐, 볼 꺼 아니야, 보일 거 아니야, 그러믄서. (연구참여자 A)
IV. 논의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가까운 미래에 환자와 영원히 이별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양상의 예견된 슬픔을 경험하고 있었다. 본 연구에 참여한 말기암 환자 가족들은 모두 환자를 돌보며 환자의 죽음을 예측하였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수용은 절대 쉽지 않아 보였다. 환자의 죽음을 예측하고 환자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며 슬픔과 연민을 표현한 경우도 있었지만, 환자의 질병 상태와 죽음에 대한 인식 자체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환자의 죽음을 이성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환자의 죽음에 대한 다른 사람의 언급에 환자의 죽음을 부정하면서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실존적 차원의 슬픔 이외에도 연구참여자들은 정 서적 차원의 슬픔과 관계적 차원의 슬픔, 그리고 실존적 차원의 인식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정서적 차원의 슬픔은 환자의 불행에 대한 고통, 의료진에 대한 원망, 환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환자의 불행에 대한 고통은 말 기암 환자 가족들에 대한 다른 연구에서도 보고되고 있는데[21], ‘아직 젊은’ 환자가 또는 ‘이제까지 착하게 살아온’ 환자가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로 인한 슬픔이면서 동시에 환자의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괴로움이었다. 가족들 이 경험하는 이러한 괴로움은 가족 본인의 성격, 환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경험하는 괴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7]. 특히, 본 연구에 참여하였던 가족들은 환자의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감정적인 고통을 가장 괴로워하면서 언급하였고, 이러한 절망감은 의료진에 대한 일종의 원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의료진에 대한 원망은 환자 가족들의 슬픔 반응에 관한 서양의 연구결과에도 보고되고 있으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나는 병적인 슬픔 반응(morbid grief reaction)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9]. 그러나 본 연구에 참여한 거의 모든 말기 암 환자 가족들은 그 정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상당히 강력한 어조로 환자의 악화되는 상태에 대한 원통함을 의료진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표출하였다. 의료진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강력하게 나타난 이유는 가족들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고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가족관계에서 자신의 정체 성을 찾는 우리나라의 사회적·문화적 특성상[5], 환자의 회복을 바라는 연구참여자들의 희망과 의술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술이나 항암치료 직후에 의료진의 ‘자알 됐습니다’라는 말 이외에 예후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점과 환자의 죽음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경험하고 있는 슬픔에 대하여 의료진의 공감과 배려가 부족하고 ‘냉정하였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환자에 대한 죄책감은 그 정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말기암 환자 가족들이 환자와의 사별 이전과 이후에 모두 느끼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7,18,21,33].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환자 가족들은 일반적으로 환자와 함께 지내면서 환자에게 잘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환자의 질병 진단과 치료를 서두르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진술한다고 한다[25]. 그러나 본 연구에 참여하였던 연구참여자 중 한 명은 환자인 부인에게 미안하였던 일뿐만 아니라 부인을 만나기도 전에 본인이 잘못하였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며 부인의 질병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였다. 두 번의면 담만으로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부부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예견된 슬픔의 한 가지 양상으로 보인다.
관계적 차원의 슬픔은 환자 가족들의 사회적 고립과 환자와 가족들 사이의 위로로 나타나고 있었다. 본 연구에 참여한 말기암 환자 가족 중 일부는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경험한 사회적 고립을 진술하였다.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와 가족들이 느끼는 고립감은 관련 연구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말기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심리 상태를 이해받지 못하면 고립감을 경험한다고 한 다[6]. 그리고 이러한 말기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도 역시 주변 사람들과 갑자기 단절되어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보고되고 있다[20]. 그러나 본 연구에 참여한 가족 중 두 명은 환자의 질병 상태에 따른 감정적 소모로 주변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관계 유지에 괴로움을 느껴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환자와의 사별 이후의 슬픔은 온전히 남겨진 가족들의 몫이지만 사별 이전의 슬픔은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으로, 거의 모든 연구참여자가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경험한 본인과 환자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환자가 의연하게 투병생활을 하는 모습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환자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가족들을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연구참여자가 죽음이 가져올 상실에 대하여 서로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하면서, 죽음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환자의 삶을 회고하고 환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였지만 죽음을 직접 언급하며 환자를 위로하는 것은 주저하기도 하였고,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보다 건강한 연구참여자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말로 환자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위로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거부하는 우리 문화에서 기인하는 독특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 참여하였던 가족 중 일부는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나타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진술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수가 매우 적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환자의 말기암 진단 이전부터 환자와 함께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여 왔다고 이야기한 두 명의 연구참여자들이 환자의 죽음 이후에 환자와 함께하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말기암 환자의 예비슬픔에 관한 연구에서 종교는 환자의 정서적 안정을 돕고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 그러나 말기암 환자 가족들에 대한 연구에서는 종교와 환자 가족들이 느끼는 간병 부담 사이의 연관성이 일관되게 보고되고 있지는 않다[24]. 환자와의 사별 이전에 가족들이 경험하는 예견된 슬픔의 과정에서 종교의 의미와 역할에 대하여서는 추가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본 연구는 예견된 슬픔이 환자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인식 변화를 끌어내어 ‘죽음’과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고 환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추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V. 결론
말기암 환자와의 사별 이전에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경험한 예견된 슬픔의 주요한 양상으로, 본 연구는 가족들이 환자를 위하여 자신의 슬픔을 가급적이면 노출하지 않고 내재화시키려는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현실적으로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기도 하였지만[20], 그보다는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 것을 염려하여 환자에게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명확히 고지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서[31], 가족들은 더욱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주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차단하고 예견된 슬픔의 고통을 고스란히 억누르고 있었다. 이렇게 내재화된 슬픔은 환자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힘들게 하여 호스피스 나 연명의료 등 생의 말기에 요구되는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고, 환자와의 사별 이후에 병리적 형태의 슬픔 상태에 놓이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특히, 의료진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강력하게 표출되고 있는 본 연구에 나타난 예견된 슬픔의 특성상, 의료진과 긴밀한 협의가 요구되는 환자의 생의 말기 관련 의사결정이 수월 하게 이루어지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 연구에 나타난 예견된 슬픔의 중요한 양상 중 하나는 가족들이 환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위로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자와의 사별 이전에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슬픔의 과정으로, 환자와 가족들 사이의 의사 소통은 환자의 죽음을 서로 애써 외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운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특성상 죽음을 외면하는 방식의 의사소통 마저도 상실을 예감하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일부 연구참여자들은 예견된 슬픔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절망적인 상황과 사별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수용한 이후에 자신에게 나타난 죽음에 대한 인식과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언급하였다.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막 연하게나마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하여 그려봄으로써, 환자 가족들은 오히려 환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감사히 여기고 긍정적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들을 대상으로 하는 죽음교육에 대한 구상은 말기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경험하게 되는 예견 된 슬픔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 고, 죽음에 대한 우리나라의 사회적·문화적 구조와 개개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환자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치료의 불확실성 속에서 나타난 환자와 가족들 사이의 의사소통 부족과 의료진에 대한 불만은 단순히 말기 상담대화를 통한 ‘진실 말하기’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초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죽음교육을 통하여 말기 환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과 이별하고 가족들이 환자와의 사별 이전과 이후의 슬픔을 원만히 경험할 수 있도록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 사이의 정서적 공감과 지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