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COVID-19 팬데믹은 진료 현장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에는 예방, 보건교육 등 공중 보건정책을 담당하는 부문과 임상 현장에서 진료가 이루어지는 부문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공중보건 윤리와 임상윤리는 각각 그 목적이 다르다고 인식하였다.1) 전자가 정책가·행정 가·전문가·일반 시민 등 이해당사자들이 건강 이라는 사회 전체의 집단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후자는 의사-환자 관계를 중심으로 환자의 자율성, 건강,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는 신뢰, 정의, 상호의존성, 연대, 상보성 등의 가치를 다루지만 후자는 자율성 존중의 원칙, 선행과 악행금지의 원칙 등을 다룬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감염병 재난과 같이 전 사회가 공동의 위협에 대처해 나가야 할 상황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영역 구분이 모호해진다. 국내에서 지난 겨울 사립상급종합병원 중환자실 병상 1% 확보 행정명령의 경우에서 보듯, 재난 상황에서는 의사들에게 개별 환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 전체 공중보건 플랜에 협조할 것이 요구된다[2]. 팬데믹 상황에서는 전문가적 관점에서 공중보건정책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주요한 주체로 참여할 필요성 모두 강조된다.2)
공중보건정책에 대한 의사의 책무와 참여는 단지감염병 팬데믹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직업성은 의사 집단이 사회와 맺은 계약에서 비롯되며, 의료인이 개별 환자뿐만 아니라 사회에 지는 책무의 개념을 포함한다[3]. 의료인이 사회에 지는 책무는 의료의 질적 수준 향상, 역량의 보증, 투명성과 책임성 등 다양하다[4]. 팬데믹 상황에서는 공공선 증진의 필요성이 극대화되고 이를 증진하기 위한 의료인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공공선 증진을 목적으로 개별 환자의 권리나 자율성이 침해될 때 환자 권리의 옹호자로서의 의사의 역할이 상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감염병 재난은 공중보건 위협과 개별 환자의 이익이 모두를 증진시킬 필요성, 또는 양자가 상충할 수 있는 상황을 배태한다. 감염병 재난 와중에 공공선의 담지자로서, 환자 이익의 옹호자로서 때로는 상충하는 의사의 역할 가운데 의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를 논하고 재난과 대응이 야기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본 글은 COVID-19 대응에서 드러나는 프라이버시 침해, 낙인과 차별의 문제를 공공선의 담지 자로서, 그리고 개별 환자 이익의 대변자로서 의료인의 역할을 논한다. 프라이버시 침해 소지에 관해서는 개별 환자 이익의 대변 관점에서 공공선과 개별 환자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확진자와 소수자 집단, 의료인 등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환자 이익 대변과 공공선의 담지자의 입장에서 환자의 이익을적 극적으로 변호해야 함을 제안한다. 본 글에서는 의료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의료인이 팬데믹 시 대에 갖춰야 할 의료윤리적 시각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론
오랫동안 의사는 의사-환자 관계로부터 환자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간주되어 왔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덕목의 예로 히포크라테스 때부터 제기되어온 기밀 유지(confidentiality)를 들 수 있다. 그 외에 환자의 자율성 존중과 권리 보장은 의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사는 의학적 지식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중보건정책에 협조하고 적극적인 방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중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세계의사회는 의사와 공중보건(Statement on Physicians and Public Health)에서 “의사와 전문가 단체들은 항상 환자들(patients)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책임이 있다. 이는 개인 환자의 진료를 보다 넓은 공중의 건강 증진과 통합시키기 위해 공중보건 당국과 협력하는 것을 포함한다”라고 밝히고 있다[8]. 여기에는 일상적인 건강 증진을 위한 감시 활동과 캠페인, 정책 입안 활동 등이 포함될 수 있다. COVID-19와 같은 보건 위기에서는 공중보건 증진을 위한 노력과 공중보건 당국과의 협력의 의무가 의사들에게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권리의 존중이라는 의사의 의무는 공중의 건강 증진 활동과 충돌 할 수 있다. 때로는 공중의 건강 증진 활동을 위해 개별 환자의 이익에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정감염병 실명 보고는 의사의 기밀유지 의무와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1980년대 초 HIV/AIDS 초기 유행 당시 감염 사실이 직장이나 파트너에게 알려졌을 때 감염자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이때 HIV/AIDS 감염 사례를 공중보건당국에 실명으로 보고하는 것이 의사의 기밀 유지와 환자 보호 의무를 저해하는지 이슈가 되었다[9,10]. 치료제가 개발되고 HIV 검사에 따라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아지면서 Opt-out HIV 검사,3) 그리고 파트너 고지까지 HIV/AIDS의 기밀유지 의무는 점차 완화 되는 추세이나 여전히 환자의 이익 측면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기밀유지나 프라이버시 존중이 공중보건 증진 활동과 충돌할 수 있는 또 다른 예는 공중보건 감시 활동(Public Health Surveillance)이다. 미국질 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의 정의에 따르면 공중보건 감시 활동은 “공중보건실천을 기획, 입안, 평가하기에 핵심적인 건강 관련 데이터를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수집, 분석, 해석하는 활동”이다[11]. COVID-19 대응에서 볼 수 있듯 공중보건 위험이 될 수 있는 이상 증상이나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중보건 감시 활동은 사전 서면 동의 없이 정보를 수집하여 사생활 침해의 윤리적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12]. 또한, 감염 등의 질병에 취약한 계층이 오히려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됨으로써 인해 낙인과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13]. 공중보건 감시 활동 결과 발생할 수 있는 낙인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쉽지 않은 쟁점이다.
물론 공공선과 개별 환자의 이익과 권리가 반드시 상충한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림 1>과 같이 한편에서는 공공선과 개별 환자의 이익과 권리가 상충하는 것으로, 숙고를 통해 균형을 잡는 것으로 본다면(A)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선과 환자 집단의 이익을 큰 틀의 공공선 속에서 합치시키는 것으로 고려하는 방향(B)도 있을 수 있다.4) 의사는 사회경제적 요소가 개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하여 가장 정직한 증인이 될 수 있으므로, 임상 현장에서의 환자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와 공동체의 공공선 증진을 위해 건강 위해 요 소의 경감과 제거, 또는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의사가 참여할 의무 또는 역할이 부여될 수 있다. 의사들은 방역 활동으로 인해 프라이버시 침해가 발생한다면 이것이 목적 대비 정당성이 확보되는지 숙고하고 필요한 조언과 정책 감시 활동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A). 한편 의사들은 감염병에 대한 낙인과 차별과 같이 공공선 증진을 방해하는 비과학적인 편견은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B). 의사뿐만 아니라 공중 보건정책을 설계하는 공중보건 책임자 역시 두 개념 간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공중보건윤리는 환자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공 공의 건강이라는 두 가지 목표 모두를 고려한다. 2002년 제정된 전미공중보건학회의 공중보건윤리강령은 “원칙 2번”에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원칙 4번”에서 권리가 박탈된 이들을 변호하며 건강 형평성 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천명한다[17]. 임상 의사들 또한 공중보건의 윤리적 원칙을 고려 한다. 전미의사협회는 법적으로 요구될 경우 기밀 유지의 의무가 예외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환자 정보를 공개할 경우 1)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공개하고 2) 가능하다면 환자에게 공개 사실을 알릴 것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공공선과 환자의 권리 사이의 균형을 꾀한다[18]. COVID-19 팬 데믹에서 접촉 추적에 관여하는 의사들은 가능한 한 정보 공개를 최소화하고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한다[19]. 한편 “건강 증진 및 예방 의료”에 관한 견해를 통해 “모든 의사는 개별 환자에 대한 임무와 공중의 건강에 대한 임무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하며” 동시에 “공중보건 분야에 활동하는 의사들은 공중보건 정책의 사회적 목표와 개인의 자율성을 적절히 균형 잡는 정책을 입안함으로써 전문직업성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명시한다[20]. 팬데믹 상황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은 개인의 자율성 존중과 공중보건 정책의 사회적 목표 두 가지 모두를 균형 있게 고려해야 전문직 윤리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COVID-19 대응 초기에 전통적인 방식의 강제력 행사보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모델로 각광받았다. 한국의 소위 3T(test, trace, treatment) 방역 정책의 바탕에는 전국 단위 조회가 가능한 보건의료, 경찰, 통신, 교통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한다[21]. 전국 단위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경찰과 방역 당국은 확진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여 검사와 격리 등 방역 당국의 조치에 응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코로나19 확진자 동선 추적을 위해 “코로나19 역학조사 지원 시스템”을 개발하여 활용하였다. 방역 당국은 “확진자의 휴대전화 위치 정보와 신용카드 사용 내역 등의 데이터를 취합하여 동선을 10분 내에 도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운용하였다[22]. 2020년 5월 초의 이태원 발 집단 감염과 8월 광화문 집회 집단감염은 한국 디지털 기술 활용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던 사례일 것이다. 방역 당국과 지자체는 통신사의 기지국 접속 정보를 통신 3사로부터 제출받고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행정명령을 통해 진단검사를 요청하였고, 불응 시에는 형사고발·구상권 청구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였다[23].
중앙집권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각종 위치 기반 GPS 데이터, 주민등록 데이터, 금융 데이터 등을 결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강한 행정 조치가 동반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디지털 기술 활용 양상은 가장 중앙집권적인 방식이며 프라이버시 침해 수준이 높다는 우려를 낳았다[24]. 이는 유럽과 미국 등에서 개발된 코로나19 대응 디지털 추적 앱(digital tracing app) 상당수가 이용자가 자발적으로 앱을 다운받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블루투스 기술을 이용한 확진자 노출 이력만을 활용 하고 있다는 점과 대비된다. 한국의 시스템은 방역 당국의 개인정보 동원 및 추적 정책이 목적 비례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검토가 필요한 반면, 감염자에 대한 신원 노출과 비난이라는 불필요한 부 수적 효과를 낳고 있어 더욱 주의를 요한다. 확진 자 동선 공개의 경우 확진자 신원이 노출되고 사회적 차별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여러 번 지적되어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 2020년 10월 7일 “확진환자의 이동경로 등 정보공개 지침 1판”을 배포하며 시간 장소별 목록으로 공개하도록 동 선 공개 방침을 바꾼 바 있다[25]. 그러나 여전히 확진자의 집이나 직장, 종교 등 민감한 정보가 제공되고 쉽게 결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26].
높은 수준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의료 현장에서 갈등으로 이어진다. 환자의 병원 방문 정보가 사 전 동의 없이 방역 당국이나 일반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고, 의료인의 기밀유지 의무와 충돌할 수 있다. 감염병 유행 상황에서 의료인의 기밀유지 의무가 예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현행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지침은 제9조 제3항에 법률적 근거가 있다면 환자에 대한 기밀 유지 의무를 예외로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감 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감염병 예방법’)」 제76조 2의 제1항에서 “질병관리본부장은 감염병 환자 및 감염병 의심자를 대상으로 처방전 및 환자 진료기록부 등의 정보 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감염병 의심자’의 정의는 “‘감염병 환자’와 접촉하거나 접촉이 의심되는 사람”으로 광범위하게 정의되어 실질적으로 같은 의료기관에서 같은 시간대에 감염병 환자와 함께 있었을 경우 환자의 의료기록 전부가 방역 당국에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병원 방문 후 자신의 의료 기밀이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자의 신뢰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의료인과 전문가 단체는 이러한 문제에 감수성을 가지고 의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부 방역 정책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5)
감염병 전파에 관한 지식이 불확실하고 전파 가능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할 상황에서 광범위 한 수준의 정보 수집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정보의 민감한 수준을 고려했을 때 목적 달성 후 수집된 정보가 어떻게 관리되고 폐기되는지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특히 확진자의 개인정보와 동선 정보는 시일이 지나면 방역에 더이상 의미가 없는 정보임에도 현재 감염병 예방법에는 방역 당국의 정보 수집 목적 달성 후 정보 파기 의무는 명기하고 있지 않고, 제3자 제공 후 제3자의 파기 의무만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제76조의 2 제6항). 질병관리청은 코로나19 관련 232만 명의 개인정보를 별다른 법적 근거 없이 영구보존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어 더욱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27]. 이는 정보인권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지는 OECD 프라이버시 가이드라인 원칙 중 “목적 구체화의 원칙(Purpose Specification Principle)”, 즉 임의적인 목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적하에 수 집되어야 하고 목적이 완수된 후에 데이터를 삭제해야 한다는 원칙과 맞지 않는다[28].
국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환자들의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은 민감한 기록을 다루는 의료기관에서 많은 딜레마를 양산한다. 의사와 전문가 단체는 정부와 방역 당국의 정보 수집 및 보유, 공개가 목적에 비교해 과도한 수집이나 공개될 경우 기밀유지의 덕목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프라이버시 침해를 우려하는 환자들에게는 환자의 정보가 수집되더라도 감염병 대응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이 수집되며 방역 당국 외 제3자의 이용은 제한될 것이라는 점, 관련 기록은 철저히 보안이 될 것이라는 점 등을 적절히 알릴 필요가 있다.
팬데믹에서 감염자 혹은 소수자 집단을 향한 낙인과 차별이 악화된다. 낙인(stigma)은 의료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속성을 갖거나 행동을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개인’이라고 분류해 버리는 일종의 표식을 의미한다[31]. WHO와 UNICEF는 낙인이 개인이나 집단의 특정한 특성을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관시킨다고 경고한다[32]. 신종전염병은 그 병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알려지기 전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포와 불안,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낙인화(stigmatization) 과정이 조장된다. 대표적인 예가 COVID-19 팬데믹 초기 미국, 유럽 등지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다. 낙인과 차별은 당사자의 피해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다양한 공중보건 문제를 초래한다.
홍콩의 SARS 유행이나 한국의 MERS 유행 당시 감염자들이 완치되어 지역사회로 돌아갔을 때 기피 대상이 되어 차별을 받는 일이 있었다 [33,34]. 홍콩대학 연구팀은 SARS 유행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낙인과 차별 경험에 대한 광범위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시행하였다[34]. 응답자들의 88.1%가 식사 초대 등 사회적 관계의 단절 (79.1%)을 경험하였다고 하였고, 48.7%가 직장 내에서 차별 경험을 보고하였다. 특히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들은 높은 빈도로 우울감(73.1%), 불 안과 초조(56.7%), 불면(34.2%) 경험을 보고하였다. 경험자 중에는 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숨 기거나 심지어 의료기관 이용을 꺼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과거의 여러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낙인과 차별이 커질수록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은 감염사실을 숨기고 의료서비스 접근을 피하게 된다. 이는 당사자도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어 공중보건 문제를 악화 시킬 수 있다.
낙인과 차별은 취약 집단의 건강에 위협이 된다. 낙인은 사실과 다른 편견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 받는 영향이 더 크다[35,36]. 낙인은 취약 인구 집단의 주거, 고용, 교육, 사회관계 등 삶의 기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자존감, 감정 조절 등 심리적 불건강을 초래하며 건강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37].
또한, 의료진에 대한 낙인은 보건의료인이 공중보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자원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회복력을 위협하고 공중보건의 유지와 증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COVID-19 치료 최일선에 있는 의료진의 대중 시설 이용을 거부하거나[38], 심지어 가족의 퇴사를 강요하는 일도 보도되었다[39]. 해외 여러 나라에 서도 의료진에 대한 낙인이 문제가 되었다. 멕시코, 말라위 등에서는 의료진이 대중교통시설 이용을 거부당하고 인도에서는 의료진이 임대주택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고[40] 심지어 폭력과 테러로 희생되기도 하였다[41]. 팬데믹 대응 의료현장에서의 과도한 업무 부담 외에 이러한 낙인과 사회적 차별은 의료인의 소진(burnout)을 가중시켜 결과적으로 환자 안전과 생명에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의료인과 의료전문가 단체는 공중보건의 위기 상황에서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공공의 안녕과 공중보건 증진이라는 책임이 있다[42]. 낙인과 차별은 팬데믹에서 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와 사회 구성원들의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직간접적으로 위협하고 사회의 공중보건 위기 극복과 회복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의료인과 의료전문가 단체는 공중보건에 악영향을 주는 이러한 낙인과 차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는 코로나19 유행이 초래한 다양한 사회적 낙인 - 의료인, 환자, 아시아인 대상 낙인 - 관련 과학 계가 잘못된 정보의 유포를 막고 대중을 교육하며 불평등과 편견의 문제에 대항하는 등 역할을 해야 함을 제언한다[43]. 하지만 한국의 의료계는 이 문제를 의사, 간호사들을 향한 사회적 존중과 보상의 시각에서 바라볼 뿐 아직 환자의 권리 보호와 공공보건 증진이라는 틀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팬데믹 이전 한국의 의료계가 낙인과 차별 문제를 의료인의 역할과 책임의 범위로 보지 않았고 공중보건 윤리를 의료계의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질병을 둘러싼 낙인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소위 질병이나 건강 관련 낙인(health-related stigma)은 정신질환, HIV/AIDS, 비만 등 매우 흔하다[44].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특정 질환에 부정적인 태도와 반응을 환자에게 보이는 경우 환자의 치료 접근성이 제한되거나 환자의 건강 추구 행위가 좌절되는 결과를 낳는다[45]. 북미와 서유럽 의료계는 건강 관련 낙인과 차별을 포함한 성 소수자, 이민자, 인종, 젠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회적 차별의 건강 영향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의사협회의 윤리강령에 반영하기도 한다[46]. 국내의 경우 2017년 개정된 대한의사협회의 의사윤리강령 및 지침에서조차 제5조 “공정한 의료의 제공”에서 “환자의 인종과 민족 등을 이유로 의료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47]. 하지만 건강 관련 낙인과 차별의 문제를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어떻게 대응하고 예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의료기관과 의료인은 의료서비스 제공 과정에서 감염자,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질환자, 외국인, 사회경제적 약자 등이 차별을 경험하지 않고 의료 서비스를 회피하지 않도록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고 지역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내야 한다. 학회, 의사단체 등 의료인 전문가 집단은 대중과 소통할 때에 낙인과 차별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에 신중해야 하고, 평소 조직 내부에서부터 낙인과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구성원에 대해 윤리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의과대학, 간호대학 등 교육기관은 미래 의료인들이 낙인과 차별 문제를 공중보건과 의료윤리 주제로 다루고 교육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강화해야 한다. 차별과 낙인 문제에 대응하는 행동 지침을 도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윤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Ⅲ. 결론
COVID-19와 같은 신종감염병은 늘 상존하는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전염병 대응을 둘러싼 다양한 윤리적 과제는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숙고하고 해결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공중 보건윤리는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공공선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기 쉽다. 따라서 의료계와 의료인이 의료 현장에서 윤리 원칙을 잘 이해하고 동시에 높은 감수성을 유지하여야 팬데믹 위기에서도 환자와 대중에게 보다 적절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사회적, 정책적 혼란도 줄일 수 있다.
의료인과 의료전문가 단체는 환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공공의 건강을 증진할 이중의 책임과 역할을 갖는다. 팬데믹에서 프라이버시 침해, 낙인과 차별은 이러한 두 책임과 역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저자들은 국내 사례들을 의료인이 사회와 관계에서 가지는 윤리적 책임과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아쉽게도 한국의 의료계는 이러한 이슈들을 다루는 윤리적 틀에 익숙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차별과 낙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윤리 가이드라인을 수립하여 미래 감염병 팬데믹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 내 의료계와 의료윤리학계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