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작하며
국립 소록도병원은 개원 후 107년이 지났다. 입원환자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한센병이란 질병을 관통하며,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아픔을 겪고 있다. 평균 연령이 78.2세(2023.1.1.), 평균 유병기간은 60.3년(2023.2.1.)이란 숫자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오랜 고통과 소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중 상당수는 만성상처(궤양)를 갖고 있는데, 수족부 장애와 긴 수병기간으로 인해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상태다. 대부분의 만성상처는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40~50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주변에 만성골수염으로 인한 골 변형을 동반한다. 수지나 족지에 골이 노출된 채 상처 위에 딱지나 굳은살이 덮이면 그것으로 상처가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환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엔 상처가 나았다가 다시 생기는 일의 반복일 테지만, 의사의 눈에는 호전과 악화를 보이는 하나의 연속되는 만성상처일 뿐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 있는 이런 류의 인식의 차이를 진료과정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겪는 경험들로 인해 확고해진 신념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잘 낫지 않는 상처를 보며, 40여 년 전의 경험을 떠올려 당시에 어렵게 구한 또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연고 또는 약을 먹고 나았으니, 그 약을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가 있다. 70~80대의 환자가 30~40대에 먹었던 약은 생산이 중단되었고, 개선된 새로운 약으로 대체되었으나, 그 약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단종되어 버린 옛날의 그 약은 당시에는 귀한 약이었을 것이고, 젊은 그들의 신체는 약이 아니어도 나을 정도로 면역력이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그들의 사고로는 40년 전의 젊은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귀한 약을 먹고 나았으니, 지금도 그 약을 먹으면 나을 것이란 신념은 40년간의 의학 발전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40년의 노화를 망각한 채, ‘나는 변하지 않았으니, 그때의 약을 먹으면 그때의 경험처럼 나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21세기 의사에게 20세기의 치료와 약을 요구한다.
이들에게 올바른 치료는 어떤 의미이며, 의미 있는 치료란 또 어떤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해답은 의학 교과서나 논문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해답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 신념이 형성된 환경과 그들의 경험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본인의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과거의 병력과 치료의 경험 또한 본인이 가장 잘 알기에 현재의 유사한 증상만으로도 진단의 과정을 건너뛰어 그때의 그 약이 필요한데, 현실의 의사들은 권위에 사로잡혀 자신의 병을 자신만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박해한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돌팔이나 말이 안 통하는 무도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편에서 주장을 계속하자면, 한센병을 비롯한 많은 질병은 현대의 자연과학으로도 모든 것을 밝히고 증명할 수 없다. 잘못된 신념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의 자연과학에 기반한 것이며, 40여 년 전의 자연과학보다 지금의 과학이 더 발전되고 더 완성된 것임을 전제로 하더라도 자연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질병과 치료의 분야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불확실한 질병을 확신하고 판단하는 모순 속에 있는 것이 의학의 본질이다. 그리고 의학과 임상에서의 치료는 각기 다른 목표와 가치가 있다. 의학은 자연과학에 기반하지만, 치료는 이를 포괄하여 환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치료의 대상은 질병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그릇된 신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전에 그들에게 올바른 치료, 즉 현재의 소록도 환자에게 의미 있는 치료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일과 이를 위해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노력은 타당하다.
한센병 또는 한센인과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대부분 한센인의 격리제도와 한센인 정착촌에 집중되었다. 한센병에 대한 정부 정책을 열거하고 이들의 폐해와 시대 상황을 기술하거나, 한센병 환자로서 경험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한 연구들이 주를 이룬다.
사회학 분야에서 김재형의 「한센인의 격리제도와 낙인, 차별에 관한 연구」[1]는 한센인의 격리제도에 초점을 맞춰 인격에 대한 낙인과 차별적인 제도의 근거와 정부 정책의 변천사, 정착촌과 음성환자에 대한 의료제도의 변화 과정을 거시적으로 기술했다. 일본 식민지 시절부터 이뤄진 격리제도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다루며, 강제 격리제도를 모든 국가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낙인과 차별은 어떤 주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의해 행해진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의료복지적 성격으로서의 한센병 환자 관리의 필요성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한센인 수난의 역사에 대한 식견을 제공한다.
노인 복지 분야에서 노상근의 「한센인 정착촌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2]는 강제 격리제도가 사라졌지만, 또다시 정착촌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채 지속되는 한센인의 ‘모여 삶’이란 의료문화의 본질에 관한 연구로서 이들의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고통을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연장시켰다. 한센병 문학의 선구자인 한하운의 시 세계를 통해 이런 논의를 발전시켜 그들이 겪는 인간적인 문제까지 조화롭게 아울렀다.
문화연구 분야에서 안지나의 「한일 한센병문학 비교연구」[3]는 근대의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강제격리 제도와 ‘단종’이라 불린 국민우생법(1940년 제정)의 의료정책, 이와 더불어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쓰카하라 도시오의 『애증』(1956)과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을 비교·분석하며 진행했다.
미술 치료 분야에서 유양지, 김갑숙은 「한센병 환자의 배우자로 살아온 고령 노인의 삶에 관한 미술 기반 내러티브 탐구」[4]에서 80대 여성 2인에 대한 미술 치료와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고단한 삶을 잘 드러내며 치료 효과를 증명했다.
김재형의 연구는 거시적 관점으로 식민 시대부터 근대를 관통하는 격리제도와 나병 관리 정책에 대해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이는 정부나 관련기관에 의해 정리되고 발표된 포괄적인 데이터와 정책의 연혁을 피상적으로 관료적 관점에서 기술한 것으로 실제 의료현장의 실상을 알기엔 한계가 있다. 노상근, 안지나 등의 연구는 환자의 처지에서 그들이 겪는 한센병의 투병기와 격리 정책을 비롯한 정부 정책의 폐해와 피해자에 대한 치료적 관점으로 접근하였으며, 논점은 의료의 실제 현장보다는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삶의 고난사에 주로 집중되었다.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진료의 과정이나, 현장 의료의 내부구조와 환경, 치료라는 의료의 작용과 환자의 투병 생활에 관한 사례나 이에 대한 질적 연구는 찾을 수 없었다.
II. 연구 방법으로서 내러티브1) 탐구
본 연구는 관계적 탐구, 내러티브 탐구로도 지칭되는 질적 연구방법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의학 분야의 논문은 근거 중심(evidence-based)으로 접근하며, 양적 연구방법을 통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한다. 이에 더해 공공의료 분야를 포함하여 의료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정부 부처에서는 자료 중심(data-based)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질병관리청에서 매년 한센병 사업 관리지침이 출간되며, 한센복지협회에서도 매년 다양한 통계를 생산하고 있고, 이에 따라 공공의료기관과 산하기관에서 관리되고 있는 환자들을 숫자로만 바라보며 관리하면서 생길 수 있는 관료주의적 관점과 계량화된 통계 만능주의의 맹점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온 한센인들의 일반화를 추구하는 양적 연구로 한정하여 계량화하는 연구보다 개별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것이 임상 연구로써, 과학적이냐 인문학적이냐를 넘어 더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일이고, 지금 여기 우리2)의 의료현장에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센병과 같은 만성질환자의 경우, 개인의 질병 체험과 치료 경험은 개인의 역사다. 이는 개인의 서사이자 질병의 서사, 치료의 서사일 수밖에 없고, 진료의 기록이자 환자의 증상이나 치료반응, 치료 순응도와 같은 연구 자료이며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과 단절된 소록도라는 섬에서 겪은 만성질환자의 서사는 질병과 치료의 경험에 더해, 의료라는 시스템에 대해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여 근본적인 상황과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현재의 의료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연구의 재료로 소록도 박물관에서 시행했던 구술화 사업의 결과물과 국립 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출판물과 환자들의 출판물들을 참조했다. 2011년 발간된 국립 소록도 100년 구술 사료집[5,6]은 소록도 재원 환자들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작업으로, 사라져가는 소록도의 체험과 질병 경험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수 환자의 서사를 여러 연구자의 인터뷰로 다채롭게 수집하여 기록했다. 환자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참여자의 당시 상황과 소감을 따로 정리하여 환자들의 서사를 그대로 옮기는데 충실했다 평가받는다. 구술사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2019~2020년에 걸쳐 5권으로 구성된 『소록도의 구술 기억』이 발간되었다. 이런 작업의 결과물을 통해 그들에게 의료가 무엇이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한 자료들은 국립 소록도 100년 구술 사료집은 I권. 『또 하나의 고향』[5], II권. 『자유를 향한 여정, 세상에 내딛는 발걸음』[6]으로 총 26인의 구술 사료를 정리했고, 『소록도의 구술 기억』은 I~III권[7−9]는 2019.12.27., IV~V권[10,11]은 2020.10.28.에 출간되었고, 총 12인의 구술 서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환자의 창작물도 참고했다. 수필집과 소설, 수필, 시집 등을 통해 이들의 직접적인 서사를 들을 수 있었다. 강창석 『내가 사는 소록도』[12], 『엄니의 희생』[13], 강선봉 『천국으로 가는 길』[14], 『곡산 인동초 사랑』[15]은 환자가 직접 쓴 수필과 소설로 그들의 삶이 핍진하게 녹아 있다. 소록도에 복무했던 인물의 서사도 참조했다. 조창원 원장의 수필 『허허, 나이롱 의사 외길도 제 길인걸요』[16], 김두영 목사의 회고록 『몰래 익은 포도송이』[17], 2021년 소록도 생애사 기록화 사업의 결과물인 윤석선, 김오수, 윤봉자 『‘작은 서울’ 소록도』[18] 등이 있다. 중요한 기초 자료로 1979년에 쓰인 심전황의 『소록도 반세기』[19]와 이를 개정, 보완하여 1993년에 재출간된 『아으 70년』[20]을 활용했다. 이런 연구 재료들은 대체로 “내러티브 탐구”라는 용어로 수렴된다.
내러티브 탐구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클란디닌(Clandinin)과 코넬리(Connelly)[21]는 “내러티브 탐구는 경험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는 한 곳이나 여러 곳에서, 그리고 환경과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가 함께 하는 협동작업이다. 연구자는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경험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경험을 살고, 말하고, 다시 말하고, 다시 사는 현장을 함께 하게 된다.”라고 정의한다. 결국 내러티브 탐구의 본질은 개별 인간(individual)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이들은 경험을 ‘이야기화된 현상(storied phenomenon)’으로 개념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경험 속에서 이야기화된 삶을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이야기들로 매일 일상의 삶을 구성하고, 이러한 이야기들로 과거를 해석한다. “이야기란 사람이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세상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 해석되고, 개인적으로 의미를 갖게 만드는 관문이다. 내러티브 탐구는 이야기로서의 경험에 대한 탐구이며, 경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그리고 최고의 방법이다. 내러티브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것은 연구에 있어서 ‘현상으로서의 경험’이라는 특별한 관점을 차용하는 것”이라는 클란디닌과 코넬리의 주장은 본 연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바 크다.
서사는 환자의 개인 경험과 그와 관련된 심리, 그리고 당시의 주변 환경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질적 연구로 거듭 날 수 있다. 환자들의 구술(서사) 내용에서 잘못된 행위 사실, 즉 현재의 잣대로 위법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비난하려 든다면, 이 논고의 취지를 오독하는 것이다.
III. 소록도, 반세기
소록도의 역사는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해방 전후, 한국전쟁의 어수선한 상황과 그 후 굵직한 한국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소실되었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역사이기에 암묵적으로 지워졌거나, 또는 자연스레 잊혀진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과거의 수많은 불합리한 역사를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 남아 있는 자료로 일제의 관료들에 의해, 해방 후의 관료들에 의해 기록된 조각난 자료와 자료마다 제각각인 숫자, 원내 행사와 유명 인사의 방문 기록 등이 있지만, 이를 통해 소록도 환자의 투병 생활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소록도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소록도를 관리하고 운영했던 관료들이 아니라, 1979년에 이르러 심전황이라는 환자의 책 『소록도 반세기』[19]가 시작이었다.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보는데, 그건 권력자인 관료에 의해 쓰인 역사가 아니라, 피지배자라고 간주되는 환자들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망탈리테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망탈리테(mentalité)란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사고, 심성, 생활 양식을 뜻한다.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과 상반되게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근대 대한민국처럼 급격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이런 망탈리테는 뚜렷해진다. 소록도처럼 고립되어 하나의 독립된 사회를 이루고, 한센병이라 알려진 신체의 변형을 초래하는 감염병을 겪는 집단으로 일본 제국 시대와 해방, 한국전쟁과 군사혁명 시기를 겪어내며, 수많은 통치자(원장)의 지배를 받은 사회라면, 역사를 단지 이력과 연보, 신문 보도기사로 정리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란 개인의 관점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맥락에 따라 연결하여 구성한 이야기다. 개인의 삶은 자기만의 고유한 내러티브이며, 우리는 이를 읽어냄으로써 그들의 생각과 행동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진실은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장 진실한 소록도의 역사는 연보가 아니라, 그들의 내러티브에 의해 쓰인 망탈리테의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관점으로 심전황의 『소록도 반세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소록도는 과거 일제의 철저한 격리주의 밑에서 군림하던 관료주의가 환자들의 생활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에 환자들은 마치 탁류를 거슬러 노를 젓는 것과 같은 역경 속에서 투병 생활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 환자 스스로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될 대로 되라는 자학적인 생활이 고질화하여 이 가운데에는 작은 이익을 참하여 갖은 사회악을 조장하는 환자들도 없지 않았다고 봅니다[19].”
심전황의 첫 문장은 ‘환자들의 생활 주변을 맴돌며 군림하는 관료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1979년 작가의 통찰은 현재의 공공의료와 맞닿은 부분이 있다. ‘병원 당국’이라는 용어로 미루어 그의 위치는 병원 당국의 피지배자였으며, 환자들의 지도자 또는 계몽자에 속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서술이 다소 권력 지향적인 문장이나 어휘로 역대 원장이나 사건을 평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나, 환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의 책은 환자들의 망탈리테를 반영한 역사서로 충분하다. 당시 환자의 문맹률이 높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고, 손가락이나 손의 변형으로 글을 쓸 수 없는 환자들이 많았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
그의 책에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은 치료자나 의사로서 원장이 아니라, 통치자 또는 권력자로서의 원장이라는 존재였다. “배고파서 못 살겠다, 원장 물러가라!” 등의 구호나 “원장님은 어버이 같았다”라는 문장들은 그의 책에서 쉽게 관찰된다.
그의 책에는 1967년, 병원 신축 장소에 대한 이견으로 인한 차윤근 원장과 환자들 간의 마찰에 관해 아래와 같은 기술이 있는데, 이를 통해 원장이란 위치가 치료자보다는 통치자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그는 “소록도의 저 긴 역사는 체념의 연속과 그 체념을 운명으로 삼는 좌절과 실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라며,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직원과 환자 간에 불신 사조가 싹텄고, 때로는 이러한 불신감은 많은 사건을 유발했다고 지적한다. 또, “박순암 산업부장은 ‘낡아 빠진 19세기 관존민비의 관료 정신이 살아있는 한 소록도의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말 한마디로 슬픈 사람이 즐겁게도 실망한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가 있는데, 자기주장만 앞세워 자존한다면 그 눈은 불원목식, 이 시의 큰 과오를 범하므로 사람은 안명수쾌하고 안고수비하는 생활 윤리를 배워야 합니다.’라고 지도자론을 펴기도 했다[20].”라며 관료 사회와 관치 의료를 싸잡아 비난한다.
그의 책에서 의료가 순수성을 잃고 관치 의료가 되어버린 모습 즉, 의사가 아니라 통치자로서의 원장이 이끄는 병원은 치료가 아닌 통제와 감시의 주체가 되어버렸고, 환자는 결국 피지배자로 이에 순응하거나 대항하는 선택을 해야 했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IV. 모여 삶
정착촌으로 대표되는 ‘모여 삶’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에 기인한다. 원인과 치료법, 감염 경로를 알지 못하는 감염병이라는 사실에서 시작된 강제격리와 수용, 감염병의 경과와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 변형과 장애 그리고 그로 인한 차별과 박해, 원인과 치료법이 알려진 후에도 지속된 편견과 변하지 않은 차별 등이 모여 사는 주거문화를 형성했다.
초기 강제수용과 격리는 일제 식민 시절이 지나고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70~80년대의 재활, 탈시설화 정책의 하나로 시행된 정착촌 정책은 축산정책과 결합하여 성공 사례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로의 복귀가 아닌 또 다른 집단 거주의 형태로 변화했으며, 정착촌의 임대업 전환 등도 이루어졌다. 1969년 10월 발족한 한센총연합회는 이런 과정들을 이끌었고, 전국에 흩어진 정착촌을 아우르며 한센인의 인권 회복과 복지증진을 위하여 한센병력자들에 대한 건강증진 및 자립 기반 확충을 위한 정착 농원 공공사업, 평균 70세 이상 고령의 한센인들과 한센인 2세들의 복지향상을 위한 지원사업, 축산기술 등에 대한 교육 홍보 사업, 한센병에 대한 계몽 활동을 펼치고 있다.3)
국립 소록도병원은 초기 격리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소 중 하나로 모여 삶의 문화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과거 8개의 마을로 중앙리, 남생리, 신생리, 장안리, 서생리, 동생리, 구북리, 새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장안리, 서생리 마을이 사라져 6개 마을이 존재한다. 이 마을들은 나름대로 별칭이 존재하는데, 이남철 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말 많은 중앙리, 경치 좋은 서생리, 연애 잘하는 남생리, 바람 많은 구북리, 감투쟁이 많은 장안리, 있으나 마나 동생리, 오기 많은 신생리”4)라고 한다. 이는 소록도뿐 아니라, 소록도 안의 각 마을도 역시 나름의 망탈리테를 갖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 모든 마을을 아우르는 자치회가 존재하고, 여기에 부속되는 산업반, 선도반, 총무반 등이 존재한다. 산업반은 자활조직으로 병원의 도로 청소 등, 선도반은 과거 보안대원 등으로 질서와 치안 유지, 총무반은 부식 업무나 환자 관리업무를 병원과 협조하여 수행하였고, 각 마을의 이장이 대표가 되어 정착촌으로서 소록도를 관리하였고, 현재도 일정 부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록도병원은 과거 수천 명의 입원환자가 있었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환자 자치단체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수천 명의 환자 중에는 비교적 건강한 환자와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환자가 뒤섞여 전국적으로 다양한 환경과 연령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들 중 비교적 건강한 환자들이 자활이란 명목 아래 환자 관리에 동원되었다. ‘환자에 의한 환자의 감시’라는 장치는 또 하나의 갈등을 만들었다. 강제수용이란 울타리 안의 직원에 의한, 그리고 이들과 협력하는 환자들에 의한 감시는 식민지 시대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다. 윤정모의 장편소설,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22]는 일제강점기의 소록도의 생활사를 묘사한 작품으로 감시와 통제를 위한 일제의 정책이 만들어낸 모여 삶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일본인 원장과 일본인 간부들, 거기에 부역하는 조선인 직원, 그에 부역하는 환자들과 힘없고 아픈 장애가 있는 환자들 사이의 이야기를 제국주의와 식민사회를 대비하여 잘 풀어내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관료주의 의료문화의 모습은 이후 의료조무원 제도를 비롯한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 정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자치단체는 직선제로 대표를 뽑는 민주적인 모습으로 발전해 왔고, 환자들의 권익을 위한 건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환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환자 개인과 병원 간의 위탁계약에 의해 입원과 치료라는 프로세스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병원에 비해) 그 특성에 따른 한계가 있는데, 환자의 위치에서 치료라는 과정은 민주주의나 공리주의, 공정한 분배와 같은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증 질환이 있는 다수의 환자와 심각한 장애를 갖고 집중 치료가 필요한 소수의 환자가 공존하는 경우, 의학적으로는 (수술 등의 처치가 필요한) 위중한 환자에 먼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는 게 옳지만, 공리를 지향하는 사회는 다수의 사람이 혜택을 받는 (당뇨, 고혈압 등과 같은) 경증 만성질환에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도록 요구되어진다는 점이다. 투표로 결정되는 선거라는 민주 절차에서는 경증의 다수가 위중한 소수보다 많은 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의료상의 공정은 사회적인 공평과 공리와는 반대에 서 있다. 그런 이유로 의료에 정치가 관여하면 목소리 내지 못하는 소수의 약자가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피해가 치명적인 이유는 소리조차 낼 능력이 없는 약자이기에 그들의 피해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의료체계에서도 관찰되는 데, 공공의료를 포퓰리즘의 도구로 이용하는 정치인들의 공약과 정책들이 이를 대변한다.
‘생활병동’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는 소록도의 ‘모여 삶’은, 의료적인 관점에서도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입원실을 갖춘 병원 개념의 치료병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립 소록도병원 내의 정착촌과 유사한 마을 형태의 주거 단위를 생활병동이라고 부르는데, 기숙사 원룸 같은 개인 호사에서 거주하며, 배급되는 의복, 주식과 부식 등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형태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례적인 입원 형태다.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생활병동마다 치료실이 있는데, 과거에는 많은 환자가 거의 매일 상처 치료를 해야 하기에 소수에 불과했던 의사에게 병원의 진료실에서 진료받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마을마다 치료실을 만들어 그곳에 마을 환자들이 모아 아침마다 약과 주사를 주고, 상처 치료를 해왔으며, 이런 문화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진료방식을 현재의 의료제도 속에서 찾는다면, 지역보건법상의 보건진료소를 참고할 만하다. 무의촌 지역의 보건진료소는 의사가 아닌 보건 진료 간호사가 간단한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여기에 보충적으로 의사들의 처방을 받아 투약과 처치가 이뤄지는 형태인데, 소록도의 생활병동에서 이루어지는 진료의 방식과 유사하다. 병원 내에서 무의촌 지역에만 허락되는 보건진료소의 진료방식이 병행되는 의료 프로세스는 독특한 입원 공간5)과 더불어 지금까지 국립 소록도병원에서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관점에 따라 현재의 의료제도 또는 법률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관행의 유래는 과거 소록도의 의료문화와 관련이 있다.
과거 소록도에서는 환자의 상처 치료를 환자에게 맡겨왔다. 그 시작에 대한 공식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였던 병원의 개원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으며, 해방 후에도 의료조무원 제도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병원 당국에서 의학 강습소를 만들어 환자에게 2년 내외의 의학 과정을 교육했고, 교육을 이수한 환자에게 외과수술과 상처 치료 등의 의료업무를 맡겼다. 1967년 다미안 재단이 소록도 의료를 담당한 이후, 제도는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이런 행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력이 여전히 부족했고,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 세기 넘도록 이어진 치료의 행태라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처럼 받아들여지는 부분이었다. 그간 소록도병원에서 무면허 의료행위가 성행했고, 오히려 병원측에서 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정황들도 많다. 이 또한 하나의 망탈리테의 역사인 것이다. 물론 환자가 의사, 간호사 대비 너무 많았고, 섬이라는 지리적 측면과 한센병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대안이 별로 없었다는 측면도 고려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관행이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드러나지 않은 여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김〇상 님의 구술을 2011년 발간한 국립소록도병원 100년 구술 사료집에서 발췌했다. 그는 의료조무원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술한다.
"여기서 고등학교를 완전히 졸업 안 하고 중퇴를 했습니다. 그때 졸업은 할 수 있었지마는 의료부 계통에 들어가 간호원 생활을 조금 했어요. 난 가지 못했는데 의학강습소를 나오게 되면은 그 여러 가지 약 처방고6) 만든 의사도 있고 그랬어. 또 내과면 내과, 외과면 외과, 자기의 기술 기능에 따라서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때 안 다녔지. 그냥 간호원 그런 명칭을 가지고 다니고 했어. 의사들 보조역할이지. 당시에는 우리 한센 가족들이 간호원을 다했어. 그때는 마을에 의사도 없어. 의사도 본관의 내과 의사, 외과 의사, 피부과 의사, 안과의사 그런 데만 의사 하나씩만 있고, 그다음부터 마을에 치료실부터 전부 다 우리 한센인들이 했다고. 치료실, 주임, 수간호, 차수 전부 다 우리여서 치료도 우리가 다 하고, 우리가 주사 다 놓고 약 처방도 전부 해주고 그랬어.
나는 그때 외과에서 조금 근무를 했는데, 어떻게 해야만 상처가 나을 수 있는지, 또 수술하는 과정 그런 것도 조금씩 배우고 그랬지. 그 일을 한다고 임금이라 줄 것이지, 그냥 봉사하는 일이여. 그래도 조금은 줬지. 솔직히 말해서 음료수대 정도랄까? 한 번 몇십 원인데, 몇십 원 주고 말지.
병원 당국에서는 원장 밑에 각 과에 과장, 계장 이런 사람도 행정적으로만 움직이고 그랬지. 실속은 우리가 거의 다 하다시피 했어. 각 마을에 치료실 다 있었는데, 치료실 주임, 치료실 수간호, 수간호 밑에 간호원. 한 치료실에 한 열 명 이상 있었어. 초등학교를 졸업해 나오면 거의 다 간호원이에요. 졸업해 나오면은 남자고 여자고 거의 다 치료실로 가지고 실습 배우게 만든다고. 치료하는 거 기술 배우고, 주사 놓는 기술 배우고.
그런께 나도 (불편한 손가락 보이며) 손이 이래도 주사 참말로 잘 놨어. 지금도 혈관주사고 어디 간호 못지 않아요. 손, 발에 상처가 오랫동안 안 낫고 있는 사람들 딱 봐서 “아 이거는 어떻게 하면 낫겠다” 하거든. 상처에도 나쁜 살이 있는데,그것 때문에 새살이 차고 올라오지를 못해. 그거 보고 ‘무살’이라 그러는데, 그 ‘무살’이 상처에 차고 있으면 절대 상처가 안 나아. 그 나쁜 살을 다 도려내고 치료하면은 치료가 잘 되고 나을 수가 있어. 상처 보면 다 알아요. “아, 이거는 상했다. 어디가 잘못됐다. 신경 어디에서 어디 혈관 타고 간다” 이런 식으로. 그라믄 예를 들어서,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요 엄지손가락 여기에가 지금 신경이 타고 지금 들어가는데 빨리 조치를 해줘야지, 안 하면 까닥하면 손을 절단해야 된다고. 신경 그 성한 데까지 잘라야 되는데, 여기에서 바로 자른 것이 아니라 요 중간쯤 와가지고 찾아가지고 살을 째가지고 딱 잘라 버려야 돼. 그라믄 더 이상 썩어들어가질 못해. 뼈도 마찬가지라. 상해있으면 상한 데까지 짤라 내야 돼. 그렇게 하면은 거의 한 달 정도만 치료하면 거의 다 나을 수가 있고.
외과 거기서 상처에 치료하는 방법, 수술하는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실습도 해보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하나 배운 덕이지, 정식으로 공부를 계속한 것이 아니고, 의대생들은 학술적으로 배우지마는 우리는 그때 학술 그런 건 배우진 않았지만 직접 실습해서 배웠거든. 근데 그때도 여기 의학강습소는 학술로 배우고, 또 바로 각 과로 배치돼 가지고 실습도 하거든. 그래서 의학강습소가 2년제인데, 졸업해 가지고 나오면, 급수로 말하자면 주임급 바로 딴다고. 의학강습소 졸업해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가지고 돌팔이의사 노릇 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그 돈 잘 벌었어. 면허증 없어도 정식 의대생보다 훨씬 병을 더 잘 고치거든. 또 돈을 줘가지고 남의 의사 면허증을 임시 차용해 가지고 사용하기도 하고 그랬어. 지금도 그런 사람 있어. 경상북도 김천 거기 내 친구가 하나 있어. 그 사람은 의학강습소도 안 댕겼어. 여기서 의료 생활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경험은 있지만, 그래도 의사 면허증이 없어. 그 친구는 대신 정식으로 의사를 하나를 자기 밑에 쓰고 있어. 월급 줘 가면서 하다본께 법적으로 걸릴 것이 없어. 그 사람도 참 잘 살아. 그 사람은 한센병이라도 지금 성한 사람 한 가지라. 그 사람 아주 참말로 팔자 고쳐부렀어[5]."
그의 진술에서 어떠한 환자가 의료조무원 또는 의학강습생이 되고,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어떤 의료행위를 해왔는지 당시 상황을 추측할 수 있으며, 이외 다수의 구술자료[6−9]에서 위의 내용을 교차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의료문화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면은 다시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과 근대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의료문화를 전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의료현장만큼은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환자에 양질의 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한다. 현재에도 호사(개인 병실) 내에서 신문지를 깔고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 마을 치료실에서 동시에 여러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 등은 과거의 관습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개원한 자혜의원처럼 지금도 마을 치료실의 대기실은 ‘ㄷ’자 모양의 구조7)다. 환자들은 오는 순서와 상관없이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자리에 모여 앉아 치료실 간호조무사를 기다린다. 치료실 간호조무사들은 나무로 만든 다리 받침대를 환자 앞에 옮겨놓았고, 환자들은 상처가 있는 다리를 그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서너 명의 환자가 그런 상태로 간호조무사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ㄷ’자의 가운데에 2~3명의 간호조무사가 맨손8)으로 일회용 드레싱 세트에서 플라스틱 핀셋으로 포타딘이 적셔진 코튼을 집어 상처에 문지른 후, 포타딘이 적셔진 거즈를 상처 부위에 올려 덮고 그 위에 깨끗한 거즈를 올려 반창고를 붙이는 방식으로 드레싱을 마무리한다. 모든 환자의 상처가 똑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간혹 폴리비닐 장갑을 끼고, 10번 또는 20번 메스 날을 들고 환자 상처 주변의 굳은살(callus)을 깎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감염, 특히 다제내성균의 기회감염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한 폐해를 막기 위해 창상 치료센터를 만들고, 분리된 공간에서 한 명씩 치료하고,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로 구성된 창상 전문인력이 전체의 창상을 치료하도록 하고, 이들에게 최신 지견의 창상 치료법을 주기적으로 교육하여 높은 역량의 창상 지식을 갖추도록 하는 일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전문적이며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창상 치료센터 내에서는 전문 의사의 지도 감독이 수시로 이뤄질 수 있어, 의료법의 취지에도 부합한 치료 프로세스가 될 것이므로 앞서 제기한 의료제도 또는 법률과 상충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의료의 질의 높인다면,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던 경험을 지닌, 그래서 의료불신이 쌓인 환자들을 전문적인 의료체계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소록도 의료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의 부정적인 치료 경험이 있는 환자들이 있고, 당시의 선택적 경험과 단편적인 지식을 현재까지 적용하려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엔 의사들도 일정 부분 이바지한다. 2~3년 단기간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 위주의 공공의료와 임기제 의사 공무원, 임상경험이 부족한 공무원 의사들의 서툰 접근과 잦은 전직이 불신을 키워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무언가 해야 할 때인 것이다.
V. 봉사와 헌신
소록도의 일면이 소외와 차별, 멸시와 혐오로 표현된다면, 다른 면을 선교와 봉사, 헌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소록도엔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녀갔다. 외국에서 온 이들은 선교의 일환으로 의료를 펼쳤고, 종교재단에서 파견한 의료진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소록도를 지킨 우리나라 의사들도 존재한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 기독교 선교사로 여수 애양병원의 의사로 있으면서 소록도를 자주 찾았던 토플[23], 그리고 다미안 재단의 일원으로 반드르겐 부룩과 함께 이곳에서 일했던 샤를 나베9)뿐만 아니라, 한국인 의사로 김인권, 하용마 등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켰다. 그중 의료분야에서 소록도 변화의 초석을 꼽는다면 67년부터 5년간 파견된 다미안 재단의 의료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수의 외국인 의사가 젊은 선교사들이었던 반면, 49세의 나이로 소록도에 온 성형외과 의사, 반드루겐 브룩은 다미안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의료진을 이끌고 이곳에 왔으며, 벨기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파견한 의사이기도 했다. 선교목적의 다른 의사들과 달리 그는 현대 의료의 정착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초빙한 의료진이었다.
1840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1873년부터 16년간 생활하며 그들을 위해 봉사하다 한센병에 걸려 1889년 4월 15일 선종한 성 다미앵 신부의 뜻을 기려 설립된 다미안 재단은 생전의 그의 봉사를 이어 한센인들을 위한 사업들을 펼쳤는데, 이 사업의 일환으로 1965년 4월 15일 벨기에 정부를 통해 한국 정부와 협약을 체결하고, 소록도에 의료인력을 파견했다. 그 대표가 소록도 최초의 성형외과 의사, 반드루겐 브룩이다. 그가 적지 않은 나이에 고향인 벨기에를 떠나 소록도에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는 이곳에 도착한 직후 발표한 1967년 신년사에 남아 있다.
“다미안 재단의 직원은 나병 치료에 대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은 네 사람의 간호사로 더 보강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4월에 잠시 이 소록도에 왔었습니다만 지금은 나병 치료를 위해 다미안 재단이 한국에 제공하는 모든 원조를 관리하기 위하여 벨지움 정부에서 파견된 의사로 다시 왔습니다. 또 다른 의사 한 분도 금년에 도착할 것이고, 제1차 계약기간은 5년입니다.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나병 치료에 20년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 경험은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얻은 것입니다. 한국의 나병 문제는 이런 나라들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인도에는 나병 환자가 200만 명이나 되고, 인구가 한국의 반밖에 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콩고에도 30만 명이나 됩니다. 우리는 힘이 미치는 한, 소록도 환자들의 치료에 공헌할 수 있는 장비와 약품을 제공하겠습니다. 우리는 벌써 병원을 개설했고, 장비도 다음 주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한국 직원들과 함께 장안리 부락 환자들의 조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환자들 가운데에는 마치 소록도의 옮겨 심을 수 없는 늙은 소나무들처럼 20년 혹은 30년 전부터 나병에 걸린 노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도 치료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있어 나병은 이미 없어졌지만, 치료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이 병 때문이 아니고, 이 병에 의한 기형이나 다른 질병들 때문에 치료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적당한 시기에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몇 년 동안에 나병이 치유된 젊은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기형이나 불구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분들은 기형이나 불구가 되었다고 해도 물리 요법과 수술로써, 어떤 기업에 종사하여 사회에서 재생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께 제공하는 것 중에서 약품과 장비가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며, 수술도 단지 환자 치료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협조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한국 직원과 모든 환자의 협조를 기대합니다. 이 협조는 여러분들이 주시는 새해 선물이 될 것이고 우리가 드리는 그 보상일 것입니다.
1967년 1월 1일
다미안 재단 한국 주재 대표 의학박사 반드루겐 브룩[20]”
그는 근무를 시작한 첫해인 1967년 새해부터 줄곧 원생들의 일제 검진에 나서 3개월 동안 장안리, 신생리, 중앙리를 조사한 후 당시 시행되고 있는 의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보사부 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였다. 그간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소록도의 의료정책, 더 나아가 한국의 공공 의료정책을 서양 정통의학의 시각으로 평가한 것으로 그의 시각과 평가는 현재의 의료와 유사한 잣대였으며, 세부적인 그의 평가는 꽤 구체적이며 적확한 것이었다. 그가 지적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 의사 부족으로 인해 의학적인 적절한 치료로써 능히 치료할 수 있는 궤양을 의사가 아닌 환자가 함부로 집도해 많은 불구자를 만들고, ② DDS의 부족으로 단시일 내로 치료, 완쾌될 수 있는 환자까지도 최고 13~18년까지 수용되어 있고, ③ 환자가 격리되어야 할 병원에 환자 아닌 일반인(음성자)이 환자들과 함께 수용되어 있다[20,24]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에 보사부 당국은 의사가 부족한 것은 지원자가 적기 때문이며, 음성자가 양성 환자와 함께 있는 것은 4·19 이후 갑자기 병원 체제로 바뀌어 각 마을이 병원으로 흡수된 연유이고, 환자가 같은 환자를 수술하는 것은 의사의 지시 아래 조수로 일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의 전문가적인 지적에 대해 수긍하거나 원인을 분석하여 대책을 수립하는 것보다 어쩔 수 없었다거나, 소록도에 부임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한국의 실정을 잘 몰라 그런 평가를 했다는 식의 변명이 전부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병원측은 나병에 대한 정형, 성형 수술이 한국에 도입된 것이 불과 5년 내외로 짧아서 생긴 무지 때문이라고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긴 했으나, 이를 비난으로 받아들여 병원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는 반응은 병원 당국이나, 환자들까지 매한가지였다.
어떤 환자는 반드루겐 브룩의 건의에 대해, “매스컴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넬리 블라이’라는 여기자가 1887년 정신병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고도 ‘부락웰’ 병원에 정신병자로 가장 투신하여, 그 병원에 수용된 수많은 환자의 목불인견의 참상을 밝혀내 미국 전 조야의 여론을 발칵 뒤집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비꼬기도 했다[20].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소록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여 의료의 영역을 발전시키려 했던 반드루겐 부룩의 노력은 심전황의 『아으, 70년』에서 볼 수 있듯이 병원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심전황은 환자들의 말을 빌려, “아직도 성형과 정형외과의 경험이 없는 병원 측의 의술진은 우선 의술면에서 위축받아야 했으며, 아무리 긴급을 요하는 절단 수술도 다미안 재단의 그 협약에 따라 재단 의술진의 합의 없이는 시술도 금해져 있어 이에 따른 피해는 환자들이 입게 마련이었다. 의술뿐만 아니라, 모든 약품은 물론, 의사와 간호사들의 처우까지 다미안 재단이 보조해 줌으로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마치 소록도병원이 다미안 재단에 예속된 듯 주체성을 잃어갔다[20].”고 주장했다.
현재의 시선으로 그때를 돌아보면, 당시 반드루겐 부룩의 통찰은 상당히 정확했으며 타당했다. 그런 그의 주장은 자신이 도와줄 환자와 자신을 지원해줄 정부와 병원당국 등 모두로부터 ‘잘 알지 못해 생긴 해프닝’으로 경시되었다. 당시의 관료주의 의료가 환자에게 환자의 치료를 맡길 만큼 무능했고,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수동적이며 폐쇄적으로 병원을 운영하여 의료 관련된 기록을 생산하지 않거나 숨기며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대응하거나 전문적인 의학지식, 과학지식이 결여된 채 환자의 눈짐작으로 배운 ‘기술’이라 불리는 ‘의료’를 임상 현장에 보급하는 일들은 벨기에에서 온 전문가에겐 모두 불합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반드루겐 브룩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그런 이유로 내부자의 관점으로 기술된 (심전황을 비롯한 환자들의 구술) 서사의 반대편에서 관찰자로서 겪은 당시 의료에 대한 그의 경험과 평가는 가치가 크다.
낙후된 아시아의 작은 나라 속 작은 섬에 현대의술을 뿌리내리려 왔던 중년의 벨기에 의사 반드루겐 브룩이 그가 도우려 했던 모든 이들, 즉 병원과 환자, 보사부 당국의 그런 반응을 보고 얼마나 허탈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5년의 약속된 기간을 채웠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VI.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정책
조무원 제도는 병원 당국이 제공해야 할 노동의 일부를 환자에게 할당하는 제도이다. 그 과정에 일정 부분 급여가 제공된다. 사무, 청소나 환경정화, 건설뿐만 아니라, 의료영역에서도 이런 조무원 제도는 소록도에서 널리 활용되었는데, 환자는 많고 직원은 적다는 이유와 환자의 재활이라는 구실이 근거가 되었다.
의료부문에서의 의료조무원 제도는 참여하는 의료의 수준에 따라 의학강습소 출신 의료요원, 의료조무원, 부첨인 등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구술 서사와 각종 자료에 언급되는 의료조무원은 시기와 맥락에 따라 의학 강습생, 부첨인, 의료보조원 등과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간호조무원 양성소가 생긴 이후, 양성소에서 교육받고 정규 자격을 취득한, 현재 의료제도에서 간호조무사에 해당하는 직원들도 경우에 따라 의료조무원이라 혼용되는 예도 있었지만, 본문에 사용되는 의료조무원은 환자로서 의료에 동원되어 소정의 급여를 받거나 받지 않고 행한 노동자를 칭한다.
조무원 중에는 1년의 이론 학습과 1년의 실습 과정을 수료한 의학 강습생이 있는데, 이들은 조제와 투약, 수술과 처방 등 의사 또는 약사에 해당하는 업무를 행하며, 사무장, 주임, 수간호 등의 직책으로 복무했다. 그보다 짧은 2주 정도의 실습 교육을 받고 간호, 또는 간호 보조 업무를 행하며 간호조무원, 의료조무원이 있는데, 이들은 의학 강습소 출신의 의료요원의 지시를 받고 복무하였다. 그리고 부첨인이 있는데, 이들은 비교적 건강한 환자로 6명의 환자 단위10)의 일원으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간병인 역할을 했으며, 이들에게는 따로 급여가 지급되진 않았다.
다음은 의학강습소를 수료한 의료요원과 그렇지 않은 의료조무원의 구술 서사 중 일부를 발췌해 재구성했다. 이들은 모두 환자이며 환자를 치료한 의료인이었다.
“녹산중학교 9회 졸업생이 되었다. 하지만 졸업식을 하고 나니 앞이 캄캄했다. 그해에는 의학강습소 입학생을 뽑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 하면 의학강습소 6기생을 모집하는 해였다. 그런데 현재 강습소수료생들이 많아서 실습이 부실하고 인력이 남아돌아 신입생 모집을 1년 연기한 것이다. 시험은 녹산중학교 1, 2, 3학년 교실 전부를 사용해서 치렀다. 총 응시자가 70여 명이었으나, 한 명씩 한 책상에 앉아야 해서 학교 전체의 책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앞에는 간호과장 딸이 앉아 있었다. 1958년 3월 소록도갱생원 부설 의학강습소 6기생에 내가 합격했다.”
“개강식과 함께 6기생 총대를 선출하고 25명이 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학과는 해부학, 내과 진단학,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약리학 과목으로 정해졌다. 선배들이 보았던 의학서적을 포함하여, 우리는 일본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공부했다. 일본어 자료이니 암기하기도 했고, 선생님들이 영어로 가르치면 또 영어로도 암기해야 했다. 의대생들이 4년간 배운 내용을 중요한 부분만 추려서 1년에 끝내야 하니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이나 정신없이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중 가장 힘든 과목이 해부학이었다. 내과 진단학은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 분야가 너무 많았다.”
“제일 먼저 외과에 배정되었다. 외과에서 다시 신생리 치료실 수간호원으로 발령이 났다. 신생리는 중앙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었으나, 만령당(납골당)이 소재해 있으며, 정미소와 목재 재제소가 있어서 중앙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다. 치료소 주임은 5기생으로 내 1년 선배였고, 나는 6기생으로 수간호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서기 1명과 간호보조 5명이 근무했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가 근무시간이었다. 주임은 치료실의 모든 일을 대표하며, 마을민의 진찰과 간단한 약품 투여 및 야간 응급환자까지 맡아보고 있었다. 수간호사인 나는 주임 유고 시 업무를 대신하고, 의약품 관리와 환자 처치를 총괄했고, DDS, 다이아송 등 본병약을 관리하고, 간호부들의 일을 관리했다. 마을 치료소에서는 오전에는 찾아오는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오후에는 중환자들을 찾아가서 순회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각 호실 앞뒤에 과일나무들이 있어서 각자의 몫으로 받은 과일과 혹은 육지에서 면회를 오면서 가져온 음식도 주면서 고맙다는 인사가 많은 정다운 곳이었다.”
“다시 인사이동이 있었다. 의료부는 정기적으로 한 번씩 인사이동이 있는데, 그것은 인기 많은 과를 서로 선호해서 순환근무케 하는 정기적인 것이었다. <중략> 내가 치과 수간호로 발령이 났다. 사무국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음 날 치과로 출근했다. 치과는 주임과 수간호원인 나, 그리고 여자 간호부 3명이 근무하였다. 처음에 나는 충치만 치료했다. 그러나 유니트가 오래되어 고장이 나서 수동엔진을 발로 밟으면서 돌려가며 충치를 치료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박자도 맞지 않고, 엔진 줄이 잘 벗어져 매우 어려웠다. 충치를 보면서 바로 갈려고 하면 발이 맞지 않아 엔진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근무시간에 외래환자 충치치료, 염증환자 주사 투약 등의 일을 마치면, 의치는 늦은 시간까지 작업해야 했다. 나는 배우는 처지였으므로 주임과 같이 늦게까지 의치를 만들고, 환자들에게 의치를 끼워주는 것을 보면서 배웠다.”[14]
“내가 1971년 2월에 중학교를 졸업해요.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좀 몇 개월 다니다가 그때 그게 좀 싫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71년도 여름, 초여름인가에 의료조무원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가게 된 계기가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을 여기 안에서 조금 쓸만하다 싶으면 여기 와서 일 좀 해달라고 책임자가 불러요. 그때 의료부에 사무장을 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그 사무장이란 분이 도와달라고 해서 우리 마을에 같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중앙리 치료실로 들어가서 조금 하다가 신생리 치료실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피부과, 안과, 그리고 내과에 오래 있었어요. 그때 우리 명칭이 의료조무원인데, 자치회 간부들도 조무원이라고 불렀어요. 다 조무원이지. 1977년에 간호보조원 양성소가 생겨서 보조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거랑은 다른 거지요. 그거는 학원이고 우리가 한 것은 우리는 정식 공부도 안 하고 무조건 채용이 된 거예요. 그래서 들어와서 나중에 앞에 선배들에게 하는 것 배우는 거고.”
“의료조무원들은 총 30명 정도 됐어요. 치료실에도 있었고, 외래 각 과마다 다 있었고, 내과, 외과, 피부과,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거기 들어가서 남이 하는 걸 보고 그냥 배우는 거예요. 의사는 그때 거의 없었어요. 한 분 있었던가? 우리는 간호 역할을 했었죠. 주사도 놓고, 의료조무원 내에서 직급은 총책임자가 사무장이고, 직원 관리하에 인사계 소속이었어요. 그 분이 우리 환자 중에는 총책임자죠. 그리고 마을에는 각 과에는 주임이 있었고, 그리고 그 밑에 간호가 있고, 남자고 여자고 다 간호예요. 여자도 간혹 한 몇 사람 있었어요. 의료조무원들은 공무원 직원들이랑 같이 오전 9시에 출근했는데, 치료실에서 야간에 자는 사람도 있고 그랬죠. 우리는 조금 더 빨리 출근해서 치료 드레싱 준비하고 치료 준비했어요. 저녁에 퇴근하고, 뭐, 월급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고, 우리가 술, 담배를 안 해서 그랬지, 술값, 담뱃값도 안 됐을 정도로 작은 액수였어요. 한 이천 원도 안 됐을 것 같아. 우리는 별로 힘든 일은 안 했고, 상처 치료도 하고 주사도 놓고 의사선생님들이 거의 없었는데, 우리가 진찰해 주라고 차트를 병원으로 보내면 처방이 내려와요. 그러면 우리가 달아놓고 맞는 주사, 궁댕이 주사, 혈관주사 다 놓고 그랬어요. 우리 일할 때는 간호사도 없었어요. 그 전에 의학강습소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 출신도 있었는데, 치료실에서 몇 사람 같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기술도 가르쳐주고 치질, 치질도 약을 조절해가는 거 하는 거 가르쳐주고, 의사가 수가 적은데 이게 치료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다 보니까 우리를 쓴 거지. 대형수술은 아니지만 조그만 상처에 매스를 대는 간단한 수술 정도는 했어요. 그런 거는 잘해. 상처를 오랫동안 치료해 왔으니까 노하우가 있지. 외과에서는 봉합수술도 했고, 나는 내과여서 안 했지만. 나는 84년까지 10년 이상 했지. 나는 내과에서만 9년 있었어요.”
“1977년에 간호보조원양성소가 생기면서 그만두게 됐어요. 정식으로 병원 부설로 생기더라고요. 그러면서 자동으로 없어졌죠. 쓸 필요가 없어져서. 그 사람들이 이제 우리 할 일을 대신 해버리니까. 우리가 하면은 내과에 있으면서 뭐를 하냐면 맥박 체크, 혈압 체크 이런 거 다하고 또 체온 재고, 진찰 온 사람들 하루에 30~40명 많게는 한 50명 다 하니까. 더 할 때도 있고,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니까. 나는 84년까지 했으니까, 간호보조원이랑 같이 일했어요. 나중에 같이 하다 보니까 내가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나온 거예요. 처음에 그 사람들은 주로 손이 딸리는 지역 어디 입원실 같은데 배치를 하니까. 처음에 간호조무사들이 많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1기에 뭐 30명 이렇게 들어오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맨 청소만 시키더라고요. 청소만 해야 되나 그러고 자존심 상하고 그러다가 자동으로 없어졌어요”[7].
광복 이후 국립 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소록도 갱생원은 의료진 부족에 시달렸다. 의료인은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하에 일본인 의료진에게 배운 의료기술 등으로 환자들의 수술 등을 담당하였던 일반직원들이 치료의 일정 부분을 담당했다.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간단한 절단 수술, 정관, 낙태 수술, 그리고 간단한 치과 치료까지 담당했다고 한다. 의료진들은 진단 및 처방 그리고 연구에 집중하고 실제로 환자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들 ‘일반직원’이었다는 것이다. 의료인력이 부족하자, 의학강습소를 만들어 당시 소록도 갱생원에 수용되어 있던 환자들에게 의학지식과 임상 기술을 단기간에 교육해, 이들에게 나병11) 치료 및 일반 치료까지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소록도 갱생원뿐 아니라, 일반 정착촌에서도 차별로 인하여 일반 병원에 가지 못하는 나병 환자들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인력으로 활약하였다[25].
소록도병원 역사에서 의학강습소는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독특한 제도이다. 광복 이후 전문적인 훈련을 요하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전문가의 부족으로 6,000여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적절히 치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소록도 갱생원은 의무과 주관하에 환자들을 의료조수로 활용코자 의학강습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의료조수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이후 소록도 내에서 의료행위의 주요 주체로 활동했다.
소록도 연보에는 1949년부터 의학강습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수 애양병원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소록도에 의학강습소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그보다 몇 년 더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여수 애양원의 원장이었던 월슨 박사는 미 군정기에 나고문관으로 임명돼 남한으로 돌아와 소록도 갱생원에 머물면서 여수 애양병원의 제도를 소록도에 이식하려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환자에게 간단한 의료교육을 시켜 실제 나병 치료에 투입하는 제도였다. 식민지 시기 소록도에서 모범적인 환자들을 ‘간호수’ 등으로 활용했는데, 이 경우는 치료를 돕는 역할보다는 환자들을 지도하는 역할이었다. 월슨 박사는 1946년과 1947년 사이의 소록도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일부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교육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록도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49년 김상태 원장에 의해 의학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었다. 1949년에 설립된 의학강습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2년 8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제1기생 16명이 졸업하게 되었다. 의학강습소 졸업생들은 소록도 갱생원뿐 아니라, 각 요양소 및 집단부락에 배치되어 나병 환자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 소록도를 방문한 코크레인 박사는 이를 두고 2년간의 훈련을 받은 ‘나병 의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병원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고 의료행위를 하고 있으며, 공무원인 의사들은 상황을 바꿀 수 없어 한쪽으로 비켜서 있다고 지적했다[26].
의학강습소에서 이들은 2년간의 의학 교육을 받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임상경험을 쌓게 되는데, 6,000명에 달하는 환자를 매일 돌봐야 했기 때문에 곧 숙련된 의료인력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의학강습소를 졸업한 환자들은 피부과, 치과, 내과, 외과 등 임상 각 과에서 주임, 수간호원, 간호보 등의 직책을 맡았다. 이들은 나병 치료뿐만 아니라, 사지 절단, 낙태, 맹장 수술과 같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까지 맡는 등 실제로 보조 의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평가에도 당시 소록도에 근무했던 한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의료지식과 기술 수준은 상당히 낮은 것이었고, 이로 인하여 의료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60년대 나 학회지의 여러 논문은 의학강습소 출신 의료진들의 비전문성을 나병 치료에 있어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한다[25].
의학강습소는 보건복지부의 지도하에 전국 각 요양소와 소록도 갱생원에 있는 유능한 환자들을 널리 선발하였다. 환자들의 관점에서 의학강습소에서 의학 교육과 의료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많은 환자가 의학강습소에 지원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의학강습소는 입학 시험제도를 두었는데, 지원율이 매우 높았다[26].
이들의 교육은 소록도 갱생원 소속 의사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외과 의사였던 정양원 원장은 기구장의 수술기구들을 모두 꺼내어 그 사용법을 의료조무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기구의 이름들을 외우도록 하는 한편, 수술환자가 있을 때면 학생들에게 수술 과정을 견학시켜 지도하였다. 그러나 증언에 의하면 이후 의학강습소 출신들이 배출되고, 실력이 발전함에 따라 실습의 많은 부분은 의학강습소 선배들에게 지도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소록도 갱생원, 나병 환자 정착촌뿐만 아니라, 농촌지역 주변 마을 환자들까지 치료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의료기술을 사용하여 큰 재산을 모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25]. 이렇듯 의학강습소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정규 의학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되지 않은 의료지식과 기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학강습소 출신들이 수술하는 와중에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낙태 등의 수술 중에 죽는 환자들도 발생하였으나, 문제 삼지 않았다. 또, 6기(1956년 5월부터 1957년 4월까지 수련) 강습생들은 인체 골격 표본을 확보하고자 부검이 끝난 여성 환자의 시체 1구를 표본처리 작업을 하던 중, 중앙리 병사 환자들이 이를 목격하고 항의하자, 작업을 중단하고 사과한 일도 있다[26].
이들은 국가 의료제도가 정비되면서 무면허 의사로 지목되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 보도한 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진주) 부정 의료업자의 단속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하고 있는 당국의 시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돌팔이 등 부정 업자가 난무하고 있는 요즘 음성 나환자마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돌팔이 행각을 해 오고 있어 뜻있는 주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진양군 대평면 내촌에 사는 음성 나환자인 정모 씨는 이곳 각 부락을 전전하면서 피부병을 치료해 준다고 선전, 돌팔이 행각을 벌여오고 있다. 진양군 보건관리에 위협을 주고 있는 돌팔이 행각을 외면한 채 단속치 않고 있어 많은 주민으로부터 감시 업무가 허술하다는 빈축을 사고 있다”12)
1961년 최재위 원장이 부임하면서, 의학강습소의 명칭을 ‘의료조무원 양성소’로 바꾸면서, 7기를 마지막으로 의학강습소는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일부 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임상병리사 등의 국가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제도화된 의료인력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의료조무원 제도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고, 일부 의학강습소 출신 의료요원들은 소록도에 남아 계속 의료업무를 담당했다. 앞서 언급된 의학강습소에 대한 자료는, 소록도에 대한 많은 자료처럼 잘 보존되지 않았다. 1949년 시작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로 중단되었고, 1952년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의학강습생을 배출했고 문을 닫았지만, 이후에도 의료조무원 양성은 계속되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의료조무원 제도가 지속되었다. 이때까지 일부 의학강습소 출신의 의료요원은 환자의 신분으로 20~30여 년간 소록도 의료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76년 소록도에 간호조무사 양성소를 만들어 1978년부터 일반인 간호조무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1979년 농어촌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고, 공중보건의사가 파견되면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의료조무원 제도는 소록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 또한 대부분의 의료 관련 정책처럼 공식 기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VII. 소록도의 높이
소록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현재 국립 소록도병원 직원과 가족, 그리고 환자와 그 보호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다. 이런 고민은 근래에 대두된 문제가 아니다. 60년대 초반, 재원 환자 수가 6,000명에 육박하였고, 과밀화와 의료진 부족 등의 문제가 대두되어, 자립할 수 있지만 생활 기반이 없는 원생들의 탈시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마도 간척공사를 병원에서 추진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은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27]이란 책에 담겨있다. 이후 70~80년대를 거치며 치료제의 보급과 더불어 수용 환자 수가 감소하였고, 이 시기 이후 부임한 모든 원장의 관심사 역시 향후 지속할 수 있는 소록도의 역할과 모델이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고민은 이미 6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고민은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 정부 기관 간의 이해관계, 고흥군의 정책, 녹동 주민의 이해관계, 경제성, 역사성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인해 뚜렷한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반복되고, 역사 유적지, 국립 요양병원 또는 치매 전문 병원 등의 가능성만을 열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외부 전문가’ 집단에 용역사업을 맡겨 소록도 미래에 대한 답안지를 받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객관적인 외부 전문가의 시선이 정확할 때도 있다. 하지만 소록도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다양한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동의가 없이 추진된 많은 일들은 이들에게 아픔을 줬던 사건이 되기도 했다.
또, 하나는 소록도에 관하여 ‘전문가’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것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굴곡진 흐름에 따라 적응하며, 변화된 보건 환경에 맞춰 변화해 온 지역적, 사회적, 의료적 공동체를 소위 ‘외부 전문가’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이 필요한 지점이다.
국립 소록도병원은 국가기관으로서 근대를 거치며 여러 문서와 통계를 생산했다. 전문가들이 참고할 이런 텍스트가 소록도와 소록도를 이루는 공동체를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미래에 대한 해답을 줄 순 없지만, 소록도를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 소록도의 삶에 대한 콘텍스트다. 위(역사가, 병원 당국)에서 만들어진 텍스트에 비해, 밑(민중, 환자)에서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콘텍스트는 본질에 근접하는 실마리가 되는데,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점은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병원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병원이란 “의사(또는 의료진)가 환자를 치료하는 공간”이라는 상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공간’만으로도 충분한 곳이 병원이라면 그 속에 주어가 되어야 할 의사와 의료진, 그리고 관료라 불리는 병원의 운영진은 이곳에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는지도 살펴볼 부분이다.
이런 관점을 벗어나 전문 자격없이 환자를 치료했던 환자를 문제시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다시 밝힌다. 병원 당국이라 불리는 존재13)가 당시 전국적으로 만연한 의료진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의 실행자였던 환자들의 콘텍스트를 살펴보고, 문제점을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공공)의료정책에서 무엇을 간과했고 무엇에 더 가치를 두어야 했는지 화두를 던지는 일은 충분히 의미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내용들을 공식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사람이 (심전황이라는) 환자라는 것 또한,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정책만큼이나 우리나라의 공공보건의료의 본격적인 태동의 과정에 있었던 관료주의 의료의 폐해를 잘 시사하는 지점이다. 이런 고민은 지금의 공공의료가 지향할 지점에 충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 속에서 소록도의 미래, 즉 병원으로서 국립 소록도병원의 정체성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VIII. 소록도의 깊이
소록도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인류학적인 관점, 더 구체적으로는 인종지학(ethnography)적 관점이 필요하다. 인종지학이란 개별적인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인류학의 한 분야로서 어떤 사회적 현상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그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으로 ‘망탈리테의 역사’로 대표할 수 있다.
‘망탈리테의 역사’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생활의 태도나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지성사와는 다른 개념이다. 기존 문화사의 편견 중 하나는 문화란 궁정이나 사상가의 서재와 같이 ‘높은’ 곳에서 만들어져 ‘낮은’ 곳으로 하달되거나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 단턴은 “밑바닥 수준에서 일하는 사람도 철학자만큼이나 지성적일 수 있다”라는 견지에서 문화가 반드시 ‘높은’ 곳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논증했다.
관념 자체만을 다루는 역사학의 분야는 사상사나 지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주로 책이라는 매개체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단턴은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보다는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던 방식을 주로 연구하는데, 이런 흐름을 관념의 사회사라고 한다[28].
본 연구는 오랜 기간 고립된 공간에 생존하고 있는 환자들의 내러티브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그간 피상적인 통계와 업적에 매몰된 역사를 벗어나 소록도 고유의 망탈리테를 드러내고자 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앞서 언급한 심전황의 『소록도 반세기』[19]와 『아으, 70년』[20]이란 책에서 시작된 망탈리테 역사로의 여정은 이후 소록도 박물관의 여러 사업으로 이어졌다. 『소록도의 구술 기억』[7−11]이라는 5권 분량의 자료집과 2권의 『100년 구술 사료집』[5,6], 『소록도 80년사』[25], 『‘작은 서울’ 소록도』[18]라는 제목의 2021년도 소록도 생애사 기록화 사업 자료 덕분에 더 많은 환자의 풍부한 서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소록도의 구술 기억』의 서론에서 집필자인 김영희 등이 우려한 바 있듯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단정적으로 구술하는 과정에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사실처럼 오해하고, 거기에 추측과 과장이 더해진 부분도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내용에는 단종 수술(정관수술), 낙태 수술, 검시(해부) 등에 관한 심리적 외상을 유발할만한 이야기가 다수였고, 단정적으로 진술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봤다더라’ 등의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회피의 방어기제를 보이기도 했다. 환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진술한 자료의 사실성 등에 대해 독자는, 구술자들이 살아온 환경을 고려하여 해당 내용에 대한 잠재적인 공포와 불안이 반영되고 왜곡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소록도의 역사에서 특이점은 진료기록지나 수술 대장, 검시 보고서 등 다수의 진료기록이 보존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병원이라는 의료기관에서는 보기 힘든 지점이다. 이에 대해서 가능한 추론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 환자들, 즉 간호주임, 수간호, 담당간호, 간호보조원 등으로 불린 무자격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의료가 행해진 탓에 기인한 것이 아닐지 추측한다.
같은 이유로 폐쇄적으로 운영된 의료와 제한된 (의료)정보는 환자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들고, 누군가는 몰래 눈감아주는 방식으로 특혜를 주거나 제한된 인원만 공유하는 정보나 자원을 이용하는 행태와 부조리가 있었음을 다수의 내러티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사람은 특혜를 준 사람을 좋은 사람, 또는 좋은 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구술 자료집에서 확인한 다수의 구술에서 수술과 주사, 검시 등의 업무를 환자 신분의 의료인력들이 행하였고, 환자들이 말하는 ‘간호’, ‘의사’란 표현이 이들과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학강습소 출신 환자들은 주로 외과에서 수술과 상처 치료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일부는 치과에서 기공 등의 업무를 담당했음을 대부분의 구술 서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과에서 진찰과 처방을 할 수 있었음에도 의학강습생들이 외과나 치과를 선호하여 수술이나 상처치료 또는 치과치료를 주로 담당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기 교육을 받은 그들에게 내과는 무리였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외과 치료는 그들에게 어떻게 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의학 교육에서 내과, 외과 두 가지만을 가지고 뭐가 쉽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별개로, 외과적인 수술과 상처 처치를 눈으로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 의학 교육을 받았고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의학강습소 출신 환자들의 내러티브에서 ‘(의료)기술’을 배웠다는 말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실습했다’, ‘이렇게 보여줬다’ 등의 문장과 함께 ‘그럴 때 끊어(amputation)내야만 돼’라는 단정적인 문장을 종종 사용[8,9]했는데, 의학적으로 전문적인 고려 없이 흉내 내는 것을 치료라 확신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얕은 의학지식으로 수술에 대한 학문적 근거 없이 누군가의 행위를 따라 하면서 이를 일반화시켜 의료를 행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행위의 피해자들은 동료 환자였다는 추측은 큰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믿음들이 만들어낸 수술 후 부작용과 문제점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임상 현장에서 쉽게 관찰되고,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생존한 환자들의 그릇된 신념을 강화시켜 현재까지 지속하게 하는 데 일조했으리라 추측한다.
의사 인력이 부족했고, 공무원 신분인 의사들의 역량이 부족했으며, 잦은 인사이동으로 오래 근무하지 못하여 환자들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런 이유와 나병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환자의 치료에 적극적이지 못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의사면허를 가진 원장들은 의료보다는 건설이나 부식, 환경 관리, 사회사업, 환자 주거에 관한 일 등 관리자로서의 업무에 치중했으며,주 업무여야 할 의료분야에 대해서는 수혜자여야 할 환자에게 실행자의 역할을 맡긴 바 크다. 병원으로부터 일정 급료를 받으며 의료업무를 하였던 환자이자 직원이면서 의료인이었던 조무원들에 대해 그들의 공과(功過)를 양지로 끌어내어 냉철히 들여다보는 일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록도의 독특한 의료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환자의 서사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자기방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기에 구술자의 진술에 거리를 두어 존중하되,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바(기의14))를 그들의 이야기(기표15))에서 헤아려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였기에 피해에 민감하고 물질적으로, 예외적 혜택을 제공하는 사람을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사람이라 쉽게 판단하는 경향을 소록도의 여러 구술 자료집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런 경향 또한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IX. 또 다른 감염병의 도래와 소통
또 다른 감염병 코로나19가 유행했고, 소록도는 다시 한번 격리를 겪었다. 2020년부터 시작한 코로나19 감염병의 유행은 2023년 말인 현재까지도 소록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년부터 22년을 거치며 불거진 위기의 원인이 감염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소록도 사람들의 공포는 다른 사람들과 결을 달리한다. 기본적으로 감염병의 일차적 방역은 마스크 착용과 철저한 격리가 바탕이므로, 얼굴을 가리고 격리라는 통제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소록도 환자들에게는 과거 한센병 발병 시 겪은 정신적 외상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추측한다. 이는 코로나19 유행 초기의 진료 과정에서도 충분히 목격되었다.
감염과 전염은 소록도 사람들에게 실제보다 과장된 공포를 심어줬다. 많은 수의 환자와 직원들이 코로나19 감염과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면역력이 저하된 일부 환자가 직접 또는 간접적인 합병증으로 사망한 일도 있었다. 격리와 통제, 백신접종 등에 과할 정도로 매우 협조적인 모습에서 이들의 공포를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의 과한 반응을 보며, 과거의 의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공공의료 역시 감염병이란 질병만이 대상일 뿐, 질병을 겪는 환자(의 심리)에 대한 고려는 여전히 소홀한 것 같았다.
초기의 한센병처럼 미지의 감염병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공포는 가공할 힘을 지닌다. 질병에 대한 정보의 공유와 과거보다 발전된 현대의학이 있었기에, 일정 부분 혼란이 있었음에도 이번 감염병 사태는 비교적 원만하게 이겨냈다고 생각한다.
2021년 겨울, 소록도병원 원내에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감염의 전파를 막기 위해 외래 진료를 일주일간 중단하고 환자의 이동을 제한하였다. 격리와 통제는 감염의 전파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이는 질병에 대한 대응이지 사람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없다.
외래 진료를 중단했던 그 일주일 동안 필자와 외래 간호사가 방호복을 입고 매일 다른 마을 치료실을 찾아 진료와 상처 치료를 했던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진료와 치료가 절박했다기보다 마을 환자들이 격리당함(소외)을 느끼지 않도록, ‘의사가 당신들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치료병동) 입원실의 면역력이 저하된 환자는 완벽한 격리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에 비해 비교적 건강한 (생활병동) 마을의 환자들이 감염병 때문에 의사와 진료에 접근할 수 없다면 의료가 사람을 포기하고 질병과 싸우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물 밖에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적막한 마을들을 지나면서, 이곳이 예전과 다른 소록도병원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진료를 신뢰하지 않고 마을 치료실에서만 상처 치료를 받던 일부 환자들이 외과 외래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치료받기 시작했고, 질병과 상처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 마음도 살펴야 한다는 신념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처 치료 과정 중에는 항상 묻고 답하고, 설명하는 수다쟁이가 되는 일이 상처 치료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이번 내러티브 탐구로 이어졌다.
소록도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크다. 이제 대한민국의 누구나 아는 마리안느, 마가렛 간호사와 반드루겐 브룩, 그리고 얼마 전 국민훈장을 받은 샤를 나베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그들뿐 아니라, 여러 종교 단체와 사회단체, 그리고 수많은 개인이 지금까지 조용히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소록도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환자들이 밖으로 나가거나, 자원봉사자들이 소록도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일 것이다. 환자라는 처지를 고려한다면 밖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활동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은 자원봉사자들과의 유대뿐이다. 이들은 한센인에 가장 우호적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온 사람들이기에 소록도 환자들의 우군이 되어 고립과 차별에서 세상 밖으로, 사회와의 유대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들에게 자원봉사의 경험은 한센인이라는 이름의 약자 삶을 공유하며 공감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록도 환자의 삶을 보며 깨닫고 얻게 되는 감사의 마음은 행복의 의미를 일깨울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자원봉사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은 환자와 자원봉사자 모두에게 어느 하나 이롭지 않은 면이 없다.
X. 마치며
지금까지 소록도 환자들의 줄거리 탐구를 통해 그들의 망탈리테를 들여다보았다. 신전황의 『소록도 반세기』에서, 국립 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 구술 자료집, 환자들의 수필과 문학작품을 통해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문화와 당시 상황, 그리고 현재까지 유효한 정서와 그 배경,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았고, 이에 관한 의미와 제언을 첨언하는 방식으로 분석하였다.
민간 의료의 영역에서 일해온 필자가 공무원 의사로서 소록도에 들어와 내부에서 접하게 된 소록도의 삶은 분명 외부에서 들여다본 것과 다른 면이 많았다. 외부인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환자와의 가벼운 인사, 직원들 간의 친절한 안부를 넘어서자, 소록도는 조금씩 낯선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곳의 많은 내러티브를 듣고 그 속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소록도는 그만큼 친근해지고, 또 그만큼 낯선 모습이다. ‘낯설다’는 평범한 표현 안에는 생경한 서사와 납득할 수 없는, 그러므로 노력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 애틋한 안타까움이 섞여 있다. 친근하다는 의미 안에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러면서도 버텨내는 숭고한 인간다움이 공존하여 필자에게 전해지는 공명(共鳴)이 들어있다. 그런 취지에서 필자는 소록도의 경계에서,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지 않은 태도로 소록도를 말하고자 하였고, 소소한 제언을 주제넘게 덧붙였다.
‘소록도’라는 한 단어 속에는 수많은 깊고, 높은 삶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번 연구를 통해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