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2022년 7월 24일 일요일 새벽, 서울 아산병원에 근무하는 30대 간호사 A씨는 출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두통 증상으로 인해 황급히 응급실을 찾았다. 의료진은 그녀에게 뇌출혈 진단을 내린 후, 뇌압을 낮추는 약물을 투여하고, 곧바로 혈류를 막는 색전술 처치를 시행했다. 출혈은 멈추지 않았고, 즉시 개두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시 원내 개두술이 가능했던 의사가 부재했다. 색전술을 시행했던 의사는 서둘러 서울대병원으로 간호사 A씨를 긴급하게 전원 조치했다. 그러나 그녀는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1].
#장면2
2022년 12월 12일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공지되었다[2].
“소아청소년과 의료진 부족으로 소아청소년과 입원이 잠정적으로 중단됩니다. 저희 병원을 믿고 찾아주시는 환자와 보호자분께 불편을 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정상운영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같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전적으로 ‘의료진 부족’ 때문이다. 매년 최저의 지원율을 기록해 온 소아청소년과의 의료 공백은 이미 예고되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3].1)
#장면3
2023년 1월 31일 보건복지부는 중증·응급질환과 분만 및 소아진료를 중심으로 「필수의료 지원대책」 최종안을 발표했다[4]. 그동안 정부는 의료현장과 전문가 등의 폭넓은 의견들을 수렴해서, 24시간·365일,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인근에서, 누구라도 골든타임 내 필수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 구축을 목표로 이와 같은 대책을 마련하였다. 주요 내용으로 ① 지역완결적 필수의료 제공, ② 공공정책수가 도입으로 적정 보상 지급, ③ 충분한 필수의료 인력 확보 등 세 가지 주요 추진 방향을 제시하였다[5].
대책안이 발표되자 다양한 평가가 쏟아졌다. 특히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재원 마련의 어려움이나 의료 현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정책 등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에 빨간불이 켜졌다.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환자들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종합병원으로만 몰려든다. 질병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대형병원으로 직행하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병상과 의료진, 소위 ‘3분 진료’의 관행이 더욱 만연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은 줄어들고, 대신에 몰려든 환자들을 대면하는 전공의는 ‘온-오프’ 시간의 구분 없이 업무를 떠맡을 수밖에 없다. 과도한 업무와 만성피로로 그들은 쓰러져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어선 환자의 줄은 도통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휴식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수도권의 종합병원이 초대형 병원으로 탈바꿈하는 동안에 지역의료의 공동화는 가속화된다.
다년간 수련기간 동안에 중환자실이나 응급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살려냈던 그들의 사명감과 자부심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전문의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마저 박탈해 간다. 과실 없는 불가항력적 분만 사고에도 피할 수 없는 처벌과 심히 우려할 만한 출산율은 산부인과나 소아청소년과의 전공의 지원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해마다 지원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인기과, 소위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에 비해 열악한 근로환경과 턱없이 낮은 수가로 젊은 의사들의 관심이 떠난 지 오래전이다.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 외과 계열 의사나 의학의 꽃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내과 역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커녕, 소송에 걸리기 십상이고 환자 보호자들에게 멱살 잡히는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민낯이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중차대한 시대적 과업을 목전에 두고, 지난 1월 정부는 「필수의료 지원대책」 최종안을 확정·발표하였다. 그동안 정부는 의료계 분야별 간담회, 각종 협의체 논의 등 다양한 형식으로 20여 차례 현장과 학계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왔다. 이를 토대로 중증·응급, 분만 및 소아진료 분야의 지원이 가장 시급한 것으로 판단하여, 필수의료 인력 확충의 필요성과 방향, 그리고 지역의료 역량 강화를 위한 방안 등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의대 정원 증원의 계획 역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필자의 논문 「필수의료의 위기와 의학전문직업성」은 병든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증상’ 혹은 ‘증후’를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해,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치료’ 방안까지 논의하고 있다. 논평자는 그의 입장에 주목하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의 진단에 의하면 대한민국 의료시스템 곳곳에서 병적 상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응급실을 찾아 헤매다가 뻔히 살릴 수 있는 환자를 결국엔 도로 위 응급차 안에서나 혹은 간신히 의료진이 갖춰진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하는 환자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비인기과의 전공을 과감히 포기하고, 소위 ‘돈이 되는’ 피부미용 등 비급여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바이탈(vital)’ 진료과목 의사들, 지방 근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공공의료는 자연스럽게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불철주야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데 여념이 없는 의료인들의 경우, 툭하면 환자나 그들의 보호자로부터 폭행이나 소송에 불려 다니기에 바쁘다. 매출 압박으로 번아웃(burn out)에 빠진 그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그들에게 사명감을 요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전문의 자격을 획득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병원에 남아있는 의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필자의 지적처럼 현재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문제점들은 한둘이 아니고, 심각성의 정도 역시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면 메스를 들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미봉책으로는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어려운 대수술을 앞둔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위기에 봉착한 대한민국 의료시스템를 바라보는 정부나 의료계, 여기에 더해 시민들의 상황까지 고려해 보면 서로의 입장은 상당히 상충되어 있다. 이는 「필수의료 지원대책」 최종안에 대한 각기 상반된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선 정부의 입장은 그동안 18년째 동결된 의대 정원의 확충으로,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정원 증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필수의료, 지역의료로 인력이 충원되는 ‘낙수효과’를 기대한다. 반면에 의료계 일각에서는 현 사태를 단지 의대 정원 수를 늘리는 것으로 해소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닌 ‘편중’ 또는 ‘쏠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료계 시스템 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개편이 없는 증원은 기존 인기과의 경쟁률만 더 치열해질 뿐,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의 공동화는 여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또한 MZ세대 의료인을 중심으로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는 소위 ‘소확행’을 꿈꾸고 ‘욜로(YOLO)’를 추구하면서 ‘워라밸’을 강조하는 오늘날 시대적 현상 역시 고려해야 한다.2)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는 진료 내용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절대적인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환자의 질병 및 건강 상태와 관련해 의사의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의료서비스의 형태가 결정된다. 한마디로 환자에게 제공될 의료서비스는 전적으로 의사의 판단에 좌우된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의사 수와 병상 수의 증가 및 집중은 의료서비스 간의 경쟁 압박을 유도한다. 의료서비스 제공에 있어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면서 신규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 역시 병원의 대형화 및 고급화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때때로 불필요한 의료서비스로 이어지면서 의사에 의한 유인수요(supplier-induced demand)가 발생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6].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 의료 수가는 태생적으로 과잉진료와 과도한 업무라는 한계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행위별 수가제’는 말 그대로 진료 행위 각 항목에 따라 비용이 책정되기 때문에 의료공급자 입장에서는 어떤 서비스 하나라도 더 제공할 때 수입이 생기는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적정 수익의 보장을 위해서는 소위 ‘박리다매식’의 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면 의료수요자에게는 비교적 낮은 수가로 별다른 제약 없이 서비스의 만족을 위해 과도하게 의료를 이용하거나 명의를 찾아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상급종합병원과 대형병원은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오랜 대기 끝에 어느덧 ‘3분 진료’가 익숙해지고, 환자 유치에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지역병원과 일차의료기관들은 서울로 이동한 환자를 대신하여 비급여 환자에게 집중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의료행태는 의료공급자나 의료이용자 모두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과도한 의료비 지출과 건강보험재정에 부담만 안길 뿐이다.4)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위기는 이미 예고된 일이다.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눈에 보이는 증상만 수습하거나 봉합하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 체계적인 계획으로 체질에 맞춘 처방을 내려 치료를 감행해야 할 때이다.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의 회생은 단순히 숫자놀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즉, 의대 정원을 늘리기에 앞서 왜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과를 기피하는지, 왜 지방 근무를 그토록 꺼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진료과마다 혹은 지역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업무량이나 처우는 간과한 채, 오늘날 MZ세대의 문화를 방관한 채, 그저 의사의 수를 늘리는 것으로 기존의 문제들이 다 해소될 만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죄가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상황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중환자를 그저 사명감만으로 진료하도록 의사에게 요구할 것인가. 정부가 일률적으로 의료 수가를 통제하는 현실 속에 매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의사들에게 그저 책임감만으로 진료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할 것인가. 당장에 가시적이고 일차원적인 방안이 아니라, 의료인들이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업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의대 정원 증원이라는 양적 보강의 변화는 그 다음 문제다.
물론 의료계 역시 반성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 제도나 수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의도적인 과잉진료를 당연시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불성실한 태도나 태만으로 진료를 꺼리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동료의사의 부주의나 오류를 바로잡기보다는 오히려 묵인하지는 않았는지도 마찬가지다. 제약회사와의 리베이트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전문인으로서의 부적절한 행위(misconduct)나 비전문가적 행동(unprofessional behavior)이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대한민국 의료계의 또 다른 민낯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인들의 자율규제나 전문직업성의 원칙에만 호소하기엔 그들을 향한 시민들의 신뢰가 그다지 두텁지 못하다.
이제 과감하게 메스를 빼 들어야 할 때이다. 정부는 ‘멸종 위기’에 처한 필수의료나 지역의료의 회복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의료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한다. 현행 의료시스템을 둘러싼 복합적인 요인들을 분석하여, 특히 해당 분야 의료인력들의 처지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국가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장기적인 철학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기반 강화를 위한 법 · 제도 개선 및 적극적인 재정 투자에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의료계 역시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자신들의 전문직업성을 철저히 성찰해 봐야 할 때이다.5) 위기는 곧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