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 대형병원 내에서,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수술할 의사가 없어서 사망한 사건[1]으로 상징되는 필수의료 위기는 선진국 진입에 자부심을 가지던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의료계와 사회 각지에서 여러 분석과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이 나오고 있다. 어떤 대책이 미래 한국의료 문제 해결의 정답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현재 나오는 어떤 방안들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계속 다듬어 나가야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필수의료 위기를 의학전문직업성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제안한 정유석의 글[2]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러 대책들이 무엇을 기반으로 세워져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화두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1. 일이란 무엇인가?
정유석은 환자-의사간 믿음의 회복, 전문직업성의 고양, 규범유리를 넘어 긍정윤리로의 전환이 수가나 정원의 논의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문제라고 제안한다. 또한, 의학전문직업성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본 논평에서는 ‘의학’이라는 특정 조건을 제외한, ‘전문직업성’ 자체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전문직업성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전적으로는 법률가나 의료인과 같은 일부 직종의 특성에 관해서 얘기할 때로 국한되어 언급된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고유의 전문성을 지닌다고 가정하고 의미를 넓혀 본다면 플라톤의 고전 문헌에서도 통치자의 전문직업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논의를 찾아 볼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3]에서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는데, 한 소피스트가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자 반박한다. 그러면서 국가를 다스릴 권한을 가진 지혜로운 자를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교육 과정을 거쳐 양성해서, 통치자가 되면 현세적 복리를 포기하고 소임을 다하는 나라를 정의로운 국가로 제시한다. 이때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받는 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되며, 이것이 정의로운 국가라고 말한다. 이런 통치자는 국가의 존경을 받게 된다. 논의 중 의료 행위를 예로 들면서 전문가가 보수를 받아 이익을 얻는 것은 각각의 고유한 기능으로 기술의 대상에게 이로움을 주기 때문인데,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에도 이익을 주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기술이나 통치는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제공하지 않고 상대에게 이로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따라서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플라톤의 결론을 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처럼 자신 이익의 도모 여부와 무관하게, 타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며, 기술과 통치는 그렇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사협회 윤리강령에 보이는 이타주의와 상통하는 것이다.
직업 윤리를 이해하는데 Wrzesniewski 등[4]이 제시한 일의 분류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일에 대한 태도를, 일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과 성취감보다는 경제적 필요와 보상 때문에 수행하고, 삶에 있어 주된 긍정적 활동으로 여기지 않는 직업(job), 미래를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여기는 경력(career), 그리고 일 자체의 성취에 만족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기여하는 소명(calling)으로 구분했다. 그들이 제시한 소명과, 플라톤이 얘기하는 정의로움, 미국의사협회에서 제시하는 윤리강령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공유되는 개념이 있다.
2. 무엇을 필수의료라고 할 것인가?
필수 의료 위기를 논의하기 전에 어떤 행위를 필수의료라고 할지 구분해야 되지만, 이를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Lee[5]는 필수의료를 “응급 ·외상 ·심뇌 ·중환자 ·신생아 ·고위험 등과 같은 의료영역으로, 지연되었을 경우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영향이 크고, 시장실패로 인해 질적 수준의 문제가 발생하거나, 균형적 공급이 어려워 국가가 직접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큰 의료 영역”으로 정의한다. 필수의료를 이렇게 국한할 경우에 주로 거론되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의 진료 인력 감소가 필수의료 위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진료과별로 혹은 개별 의료 행위로 따지는 것이 적절치 않고, 모든 의료행위가 필수 의료라는 의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6]. 활력증후의 안정성과 관계 없다 하더라도 장애아동의 사회적응 문제를 담당하는 재활의학이나, 안면 화상으로 사회적응이 어려운 환자에서의 성형 수술 사례를 상상해 볼 때 필수 의료를 진료과별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필수의료를 소명 의식에 따른 의료로 보고 싶다. 플라톤에 의하면 진료받는 자의 이익에 기여하며, Wrzesniewski 등이 제시한 경제적 보상보다 일의 성취와 사회적 기여를 중시하는 행위이다.
3. 모든 의사는 소명감만으로 일하는가?
한 인터넷 설문 조사에서 미국 의사의 73%가 의료행위를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7]. 한국인의 직업의식 및 직업윤리연구 7차 보고서에 의하면 의사는 간호사, 초중등교사와 더불어 직업윤리 점수가 5점 만점에서 3.37점으로 전 직군 중 가장 높아 가장 낮은 국회의원(2.45점)과 차이를 보였고, 직업군인(3.16점), 시민사회운동가(3.11점), 법조인(3.01점), 3급 이상 공무원(2.94점), 언론인(2.85점) 등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다른 직종에 비해서도 높았다[8]. 물론 이 보고서에서 언급하는 직업윤리와 일에 대한 소명의식은 온전히 대체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니기에 우리나라의 현황을 추론하는 정도일 뿐이지만, 참고는 해야 할 내용이다.
개별 전문과목 만으로 필수의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듯이, 개별 의료인의 모든 행위가 소명의식에 합당해야 된다거나, 모두 어긋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플라톤은 정의를 논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정의롭거나, 불의한 사람이 생길 수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본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한다[3]. 이상적인 본이 소명의식을 가진 이타적 의료라고 한다면,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한 대안이 무엇일지를 논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전체 직업인이 삶의 영역에서 중요시하는 점을 알아본다. 직업의식 및 직업윤리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7점 만점을 기준으로 순위를 정할 때 가족생활(5.94), 일(5.37), 여가생활(5.35), 학업 또는 능력개발(4.93), 사회활동(4.44), 종교활동(3.46) 순으로 가족생활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경제적 보상과 시간을 논외로 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관점에서 전문과목 현황을 보자. 2023년 국내 의사의 필수의료 전공의 지원 현황을 보면 소아청소년과(25.5%), 심장혈관흉부외과(61.1%), 외과(65.0%), 산부인과(77.5%)는 모집인원보다 미달이다[9]. 또, 전공-진료 불일치율이 심장혈관흉부외과(81.9%), 외과(52.1%), 산부인과(38.0%), 소아청소년과(20.0%)에서 높다는 통계는 전문의가 되었다 하더라도 전공을 버리고 단순 진료로 돌아서는 의료진이 많다는 사실을 반영한다[10]. 모두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적 보상, 과도한 노동 시간 때문에 기피하는 의료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를 역으로 보면 낮은 수가, 살인적인 고강도 긴장과 노동시간, 높아가는 의료소송 빈도와 형사처벌 판결 때문에 차라리 전공 포기 후 일반의로 진료를 하는 것이 더 나은 현실적 선택인데도, 많은 의사들이 소위 기피과 진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병원의 많은 교수들 역시 개원 혹은 2차 병원으로 이직할 때 배 이상의 보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지키고 있다. 시장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4. 필수의료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필수의료가 유지되려면 소명으로서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가 필요하다. 소명의식과 같은 덕이 교육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덕이란 지식과 지혜뿐 아니라, 정서와 의지가 포함되기 때문에 교육에만 의지할 수 없다. 타고난 심성이 중요하며, 의료인의 선발과정에서 걸러져야 된다. 하지만 객관화해서 다수의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선발된 인원 중 소명감을 가진 의사가 필수의료를 떠나지 않도록 하고, 직업과 소명의 중간지대에 있는 의사들이 가능한 더 많이 소명으로서의 일을 선택하도록 유도해야 될 것이다. 소명감을 가진 의사들은 왜 필수의료를 떠나게 될까? 플라톤은 자신보다 피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한 통치자에 대해 존경으로 보상하기를 제안한다[3]. 직업으로서의 일은 경제적으로, 소명으로서의 일은 성취감과 존중으로 보상되어야 한다.
완벽하게 정의롭거나 불의한 사람, 또는 직업군은 없다. 특정 개인의 개별 행위도 전적으로 정의롭거나 불의하지는 않다. 따라서 불의한 면은 비난하고, 정의로운 부분은 존중 받아야 될 것이다. 만약 어느 직군에나 있는 일부의 불의를 그 직군 전체의 특성으로 낙인 찍어서 매도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의견과 제안을 이기심의 표현으로 왜곡한다면 최선의 해법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례로 산청군 보건의료원에서 연봉 3억 6천만 원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했다는 뉴스는 지방의료 공백의 단면을 보여 주는 듯이, 널리 보도되었다[11]. 하지만 그보다 4년 전 개원을 접고, 낮은 급여에도 불구하고 의료 봉사하듯 근무했던 산청군 보건의료원장이 공무원 직원과 노조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다는 반대 사연[12]은 같이 전하지 않는다. 격오지 내 의료 보조인력의 협력과 장비 등 인프라에 대한 개선책은 접고, 단지 의사 한 명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주민의 의료 소외가 이루어진 듯이 보도하거나, 그래도 오지 않는 의사는 돈만 아는 부도덕한 직군으로 매도하면서 숫자를 늘려 떠밀리듯이라도 오도록 강제해야 된다는 발상으로는 현재의 필수의료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의료진은 살인적인 긴장감과 과로 때문에 탈진하고, 자살 충동을 느낀다[14,14].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는 의사 증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힘든 수련을 마치고 얻은 전문의 자격증도 포기하고 떠난[10] 의료 현장으로 새로 증원된 의사들이 떠밀려서 수련을 받으러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존의 의사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안이 아니라면 새로운 의사가 그 일을 시작하기 어려워 보인다. 처벌과 징계로 악행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선행이나 소명을 장려할 수는 없다는 Cheong[2]에 동의하는 바이다.
소명의식을 가진 종군기자 수를 늘리기 위해 기자를 많이 선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기사의 정확도를 높이려고 오보를 형사 처벌하거나, 위험지역으로 들어가 취재하지 않은 기자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방법은 바람직한 것일까? 그보다는 소명감에 따른 행동에 걸맞게 존중하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언론사주나 편집진의 의견만으로는 종군기자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듯이, 고용주인 병원장이나 의료행정학자 역시 소명감을 가지고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료인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없다. 그저 시장의 원리로만 설명한다. 하지만, 소명의식은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치의 문제이다. 타인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죽을 것 같은 긴장감으로 밤을 새워본 적이 있다면, 시장 원리를 벗어난 가치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게 된다.
가치와 덕은 타고난 심성에 영향을 크게 받겠지만, 성장과정에서의 교육으로 일부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뤄지는 것이다. 부모와 교사는 의사가 되면 얼마나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는가, 혹은 의사만 된다면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유혹했는가? 다른 고소득 직종은 다른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풍요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 타인의 헌신을 경제적 보상만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선택으로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묘책이 나오기는 어렵다.
차선책으로 직군 내에서라도 전문직업성과 가치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이루어져야 될 것이다. 의과대학뿐 아니라, 수련과정이 이루어지는 의료기관 내에서 가치를 존중하는 의료환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존 의료인의 자정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를 고민해야 될 것이다. 소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기존의 필수의료 종사자를 폄하하거나 매도하기보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개선책을 찾으려는 제도적 도움이 필요하다.
존중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필수의료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존경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한다는 배신감이다. 사망률을 30%에서 10%로 줄일 수 있는 일을 했지만, 10%의 사망률의 결과로 배상과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면 어떤 직종의 어떤 누가 100% 완벽한 일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생명의 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에 조금의 실수도 용서될 수 없다면 생명을 지키는 일에 무한의 보상과 혜택을 주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의대정원 확대, 의료 행위에 대한 민형사 판단, 의료전달 체계, 의료비 책정 등 어떤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든, 그 근본은 의료 행위자를 사회공공재로 취급하지 않고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되어야 될 것이다. 그렇게 구성원이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본이라고 생각한다.
필수의료란 무엇인가, 소명감으로 행하는 헌신적 의료 행위이다. 소명은 무엇으로 보상 받는가, 존중으로 격려될 수 있지만 시장의 원리로 구매하거나 강요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의료인가, 소명으로서의 필수의료인가를 먼저 결정하고 그에 걸맞는 대책이 세워져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