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고윤석은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에 대해 법의 합리성과 그 배경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는 법이 시행되게 되었을 때 환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식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방식, 제도적 심의의 정당성, 그리고 의료인이 안게 될 고충을 거론하면서 더 많은 범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이런 법안이 제안된 배경으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임종 돌봄에 대한 제도-시설-의료적 환경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보완 이 선행조건임을 주장한다[1].
본 글은 법안이 발의된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서 법안 발의와 그에 대한 높은 국민 찬성을, 존엄하지 못한 죽음이 피할 수 없는 미래로 존재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공포로부터의 ‘집단적 탈출(exodus)’을 시도하는, 일종의 사회적 저항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존엄한 임종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의사조력자살’ 요구가 아닌, 총체적으로 황폐화된 생애말기 삶의 질과 죽음의 질에 대한 전국민적인 거부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안의 합리성에 대한 검토에 앞서 비참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 이러한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적 검토는 향 후 제도 및 정책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 의사소통의 공감대를 제공하고 효율적인 논의를 이끄는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2. 본론
2022년 10월까지 150만 명의 국민이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현재까지 약 25만 명의 연명의료 보류 및 중단이 이행되었다[2]. 월평균 사망자 수는 26,000명 정도인데 그 중 약 75%인 19,200명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한다[3]. 국립 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월평균 약 5,200명이 사전결정에 따라 임종을 맞이하고 있으므로, 이는 전체 병원 임종의 27%에 해당한다[2]. 2021년 호스피스 이용자는 약 19,000명(월평균 1,580명)이 며[4], 이는 단순 추산 시 연명의료결정이 이행된 환자의 30%에 불과한 수치이다. 그렇다면 사전에 연명의료를 거부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한 이들의 70%는 도대체 어디서 임종을 맞이한 것 일까?
정확한 조사는 없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법으로 임종실이 의무화되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다른 환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다인실에서 임종을 허용치 않음을 감안할 때 1인실, 중환자실, 그리고 처치실이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임종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급성기 종합병원에서 다수는 상태가 악화되면 중환자실로 옮겨 연명의료를 받다가 사망에 이르게 되고, 사전에 연명의료 거부 결정이 이 뤄진 경우는 고가의 1인실로 옮기거나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권유받게 된다. 그마저도 여의치 못한 경우에는 결국 최종적으로 처치실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병원임종의 현실이다[5].
2020년 노인실태 조사에서 대한민국 노인들은 가족과 함께하며, 주변에 부담을 남기지 않고, 고통 없이 평온하게 삶을 정리하는 것을 좋은 죽음의 요건으로 꼽았다[6]. 데이비드 재럿(David Jarrett)은 나이가 들어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떨어지면 집이 아닌 요양시설로 옮겨져 수시로 급성기 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다가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 병원임종을 현대인의 가장 흔한 죽음 즉, ‘최빈도 죽음(the most frequent death)’이라고 말한다[7]. 그런 병원임종의 실상에 대해서 미국 듀크의대 학장 앨런 프런시스(Allen Frances)는 ‘쉴 새 없이 주삿바늘이 찌르고, 온종일 소음과 불빛으로 쉴 수 없고,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죽는’ 병원임종을 가장 나쁜 죽음이라고 지적한다[8]. 일본의 내과 의사 야마자키 후미오(Yamzaki Fumio)는 생명지상주의에 휩쓸리는 현대사회에서 병원임종은 연명의료라는 의학적 폭력이 일반화된 비참한 죽음이라고 말한다[9]. 서울의대 윤영호 역시 대한민국 병원에서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며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고 외친다[10]. 19년간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였던 김형숙 또한 중환자실 연명의료와 심폐소생술은 병원임종의 통과의례이며, 사망 후엔 최대한 짧게 가족 면회를 시킨 후 신속하게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것이 인간미 없는 병원임종의 관행이었다고 고백한다[11]. 이렇듯 임종실도 없는 병원에서의 임종은 가족과 떨어진 채 연명의료로 고통받다가 경제적 부담을 남기고 미처 주변도 정리하지 못한 채 맞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병원임종이라는 최빈도 죽음의 쳇바퀴에서 탈출(exit)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 과제가 되었다.
1982년 스위스에 설립된 의사조력자살을 돕는 단체의 이름은 ‘엑시트(EXIT)’이다. 공교롭 게도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지원하는 단체들의 이름 역시 ‘EXIT’와 ‘Exit International’이다[12]. ‘엑시트(Exit)’는 특정 상황이 종료되거나, 그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 단체들은 생애말기 또는 말기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죽음을 돕는 자신들의 행위를 비참함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성인 76.4%가 의사조력자살 법제화에 찬성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13]는 개인 차원의 ‘엑시트(exit)’를 넘어 공동체 차원의 ‘엑소더 스(exodus)’를 떠올리게 한다. 해외에서는 의학적으로 조절되지 않는 극심한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조력자살의 가장 우선 요건이지만, 한국의 경우 육체적 고통보다 삶의 무의미함, 자기 결정권, 자신과 주변이 겪게 될 현실적 고통, 경제적 부담 등 생애말기 삶의 질에 대한 비관이 주된 이유였다[13]. 이를 뒷받침 하듯 의사조력자살 법안 발의 직후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시행한 다른 여론조사에서 생애말기 사회적 지원에 대해 만족하는 비율이 4.9%에 불과했으며, 연명의료를 거 부하는 비율은 81.7%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존엄 한 죽음에 대한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로 간병 및 의료비 부담 경감, 호스피스 확충이 80.7%로 의사조력자살 합법화 13.6%보다 6배가량 높았다 [14]. 이상을 종합해 보면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높은 국민적 찬성의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최빈도 죽음으로 상징되는 생애말기 삶의 질과 돌봄 지원, 그리고 임종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비관과 불 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비관론적 미래에 대한 실제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비참함과 주변의 비극을 피하기 위한 안락사로의 ‘엑소더스’ 요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비관만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미래는 그토록 절망적인 것일까?
최근 한국 사회의 삶의 질 지표는 그러한 대중의 비관에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15]. 한국 사회는 국내총생산(GDP) 규모로는 세계 10 위의 부유한 국가가 되었지만 심각한 양극화로 인해 일반대중들은 여가를 누리지 못한 채 여전히 생존을 위한 경쟁을 살아가야 한다. 경제 수준이 비슷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는 연간근로시간은 2번째로 높았고, 고령인구 증가율은 평균보다 약 2배 높은 1위였으며, 노인빈곤율은 평균의 3배에 달하는 1위였다. 그로 인해 국가 행복지수는 하위 세 번째인 35위를 차지했다. 특히 더 안타까운 것은 OECD 및 유럽연합 회원국을 포함한 38개국 중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학습 성취도는 10위권이었으나 정신적 웰빙지수는 최하위권인 34위를 차지했다. 이를 종합하면 중장년 세대는 여가생활 없이 생존을 위한 높은 근로 시간에 시달리고, 은퇴 이후 노인 세대가 되어서는 일생의 생존경쟁이 무색하리만큼 빈곤에 시달리며, 사회 전체가 노인들의 돌봄을 노인요양시설에 맡긴 채 자기 자녀들의 육아와 교육에 몰두하지만, 어린이들 역시 불행하다고 말한다. 이런 대한민국에서의 생존 현실은 OECD 회원국 중 세 번째로 불행한 나라이고, 20여 년째 자살률 1위를 지켜오고 있다. 이를 대변하듯 다니 엘 튜더(Daniel Tudor)는 한국사회에 대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경제적 부를 이뤘으나 모두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모순적인 사회라고 평가한다[16].
이런 모순의 배경에는 생(生)의 전체화가 자리 잡고 있다. 서영화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에토스를 생의 전체화라고 지적하면서, 이는 그 사회가 ‘생의 활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표상하여 생과 젊 음에만 긍정성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에서 죽음, 늙음과 나약함을 소외시키고, 이러한 노화와 죽음의 배제가 더 나은 삶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 어리석음을 일컫는다[17]. 이는 과학기술을 통해 자신의 몸과 정신 능력을 갱신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 (transhumanism)’을 넘어 영생불멸을 위한 사체 냉동, 인간 복제 등 생명지상주의의 배경이 되며[18], 나아가 한병철이 경고했듯 더 높은 생의 성취를 위해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착취하는 ‘피로사회’로 나아가게 된다[18]. 결국 생의 전체화는 살면서 생의 가치만을 강조하고 죽음의의 미를 소외시킴으로써 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과 정이 아닌 피해야 할 재난으로 인식시켜 고스란히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환경의 비참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재난을 대처하는 최전방에 의학과 병원이 포진하고, 노화와 죽음마저도 의학의 힘으로 거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삶으로부터 존엄한 퇴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연명의료라는 결과로 처참히 배신당한다. 첨단의학을 통해 삶의 가능성 위에서 약동하는 생의 가치를 기대했지만, 연명의료는 생명에서 삶은 배제하고 기계와 약물에 의해 박동하는 목숨만을 제공하게 된다.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생의 전체화에 대한 강박이 누그러지지 않는 한 연명의료라는 피리 소리를 따라 우리는 끝없이 병원으로 자신의 마지막 삶을 밀어 넣게 된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마을공동체가 해체되고 연대가 사라진 개 별화 사회로 전환되었다. 자신의 생존에만 몰두하고, 부족한 부문은 전문가 시스템에 의존하는 개 별화 사회의 삶의 방식은 효율적인 생존을 가능하게 했지만[20],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노년기의의 존성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21]. 반면 생애말기를 공동체(가족, 동 료, 지인)의 동행과 배려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실존에 도전하거나 집에서의 평온한 임종을 통해 자신의 존엄과 정체성을 지켜낸 이들도 있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에 걸린 모리 (Morri Schwartz)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는 과정의 동반자로 제자 미치(Mitch Albom)를 선택했고[22],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宮野 眞生子)는 유방암 말기의 삶을 동료학자 이소노 마호(磯野 眞穗)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실존철학을 완 성하는 과정으로 승화시켰다[23]. 신경외과 전공 의이자 말기 폐암환자였던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는 아이를 갖고, 전문의 시험에 응시하고, 죽음에 관한 책을 쓰겠다는 삶의 마지막 도전을 아내 낸시와 주치의 엠마의 지지와 도움으로 우아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24]. 아산정책연구원이 품위 있는 죽음 사례로 소개한 김석기 옹은 96세가 되 던해 기력이 쇠하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단호히 입원과 의학적 처치를 거부하였고, 자녀들은 이를 존중하여 집으로 모셨다. 김 옹은 인공영양 대신 곡기를 끊은 채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옛 추억들을 나누면서 평온히 눈을 감았다[25].
인간의 죽음이 허무한 소멸이 되지 않고 존엄한 서사가 되기 위해서는 말기에 겪게 될 고통과 고립으로 일생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일상을 지켜주며, 좋은 기억으로 보존해 줄 수 있는 보호자이자 목격자로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존엄한 죽음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병원임종이 비참한 이유는 죽음 직전까지 감염관리와 치료 효율 등을 이유로 환자와 가족을 분리하고, 환자의 마지막 일상 역시 치료를 이유로 철저히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원에서는 개인이 일생을 지켜온 삶의 가치는 보류되고 오직 환자라는 정체성에 갇혀 죽음의 순간까지 목숨 연장만을 최고의 선으로 강요받는다. 생애말기에 이른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 온 자기 정체성과 상관없이 의학의 수단이 되어 휘둘리다가 삶에서 퇴장당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전혀 존엄하지 않고, 오히려 초라하고 비참한 비극이다. 문제는 이런 비극적 죽음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흔한 죽음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극을 반성하고 경고를 날려야 할 의학교육과 생명윤리의 역할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것 같다. 한 학술지에서 ‘Everyday death’라고 표현한 것처럼 오늘날 죽음은 병원에서 의료인이 매일 일상적으로 겪는 사건이 되었음 에도[26] 아직 대한민국 의과대학 중 죽음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다. 인간적인 죽음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는 의료인들은 환자와 죽음에 관한 대화를 꺼리게 되고, 자신과 가족이라면 하지 않았을 치료를 환자에게 시행하면서 죽음을 부정한다[27]. 생명의료윤리 역시 죽음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근대의 규범주의와 원칙주의에 묶인 채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 담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28]. 현실에서는 비참한 죽음이 양산되고 있음에도 환자와의 서 사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의료인의 통찰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윤리적 토대에 대한 논의는 답보상태에 있다[29].
1982년 김득구 선수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원정 시합에서 뇌출혈에 의한 뇌사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 사회에서는 이전에 없던 안락사 논쟁이 일어났다. 식물인간, 뇌사, 연명의료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할 때였으나 김 선수의 기계호흡장치 제거 문제는 이제 안락사 문제가 해외 사건이 아닌 우리 사회의 현실로 다가오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자칫 죽음에 대한 논의로 생존 동력이 저해될까 하는 우려로 논의는 이내 사그라들었고, 지난 40년간 한국 사회는 생존경쟁이 불러온 높은 자살률,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고착된 연명의료, 돌봄 부담으로 인한 늘어가는 간병살인 문제를 감추면서 죽음에 대한 문화적 성찰과 사회적 공론화를 미뤄 왔다. 그렇게 일상에서 죽음이 망각되고 생존 강박에 휘둘리며 병원으로 몰려오는 동안 자기 서사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은 사라지고, 마치 공산품을 찍어내듯 죽음으로부터 도망 다니다 죽음을 ‘당하는’ 병원임종이 죽음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죽음을 가르치는 곳도, 배울 기회도 없다. 전 국민의 넷 중 셋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지만, 여전히 의료인에게 죽음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의학의 실패이고, 병원은 경쟁적으로 장례식장을 확장하면서도 임종실 설치는 관심에 두지 않는다. 이렇게 병원에서 죽음이란 인간적인 모습과는 거리 먼 한 낮 의학적 사건으로 다뤄짐에도 불구하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은 여전히 병원을 죽음의 장소로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인 ‘상호허위(mutual pretense)’에 빠져 있음을 드러낸다.
사회학자 바니 글레이져(Barney G. Glaser)와 안셀름 스트라우스(Anselm L. Strauss)는 말기 환자에게 가족도 의료진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치료만을 말하고, 환자 역시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몰라 서로 생존만을 이야기하는 의료현장의 ‘상호허위’ 현상을 지적한 다[30]. 이렇게 암묵적 허위가 생명을 위한 최선이라는 사명감으로 둔갑하면, 의료진은 자신의 무력감을 회피하기 위해 말기 환자와 죽음에 관한 대 화 대신 마지막까지 치료와 검사에 집착하게 된다 [31,32]. 매일 혈액검사를 통해 부질없는 전해질 수치 조절에 자존심을 걸고, 기능이 떨어지는 장기마다 배액관을 꽂고, 더 강한 항생제를 조합해 투여하고, 저물어가는 기력만큼 칼로리를 채워 생 존을 채찍질하듯 정맥 영양제가 주입된다. 죽음에 대한 상호 허위는 목숨 지상주의를 생명 존중과 동 일시 하고, 인간 존엄을 법적 규범과 윤리적 원칙 안에서만 계산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상호허위는 생의 전체화 사회에서 목숨 지상주의라는 사회적 도그마로 진화하여 죽음을 병원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환자로 마무리되는 삶에서 의료진은 규범과 원칙이라는 최선을 다했음을 안도하고, 가족들은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를 하지만, 죽음 앞에서 평온했어야 할 환자의 몸은 훼손되고, 강탈된 건 서사적 주인공으로서의 가능성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높은 찬성으로 분출된 국민적 요구는 법제화 이전에 한국사회에 고착된 두 가지 허위로부터의 탈출을 요청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 삶에서 생의 가치만을 추앙한 채 죽음의 의미를 배제하고, ‘목숨을 위한 생존’이 ‘존엄을 위한 실존’과 동일하다 착각한 인식의 오류이다. 두 번째는 그런 인식의 오류로 인해 삶의 행복에 기여해야 하는 제도와 의료가 죽음의 질을 고려하지 않아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지나온 삶의 질을 송두리째 무시할 만큼 그렇게 목숨이 중요한 것이냐며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인식 오류와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는 윤리학자 조지에 이지치(George Agichi)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33].
3. 결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죽음은 결코 개인의 차원에서 다뤄지는 사건이 아니었다. 마을공동체가 나서서 함께 애도하고 위로하며, 전통 상례에 따른 임종과 제사를 통해 망자의 소멸은 공동체와 가족 들에게 기억되고 의미화되었다. 그러나 도시화 이후 급속히 재편된 주거구조는 생존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마을과 가족공동체의 연대에 기반했던 죽음의 문화마저 무너뜨렸다. 그 빈자리는 기술주의에 기반한 연명의료와 병원임종이 채웠고 그것 이 지금의 비참한 죽음의 현실을 초래하였다. 이렇게 죽음이 개별화되고, 의료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번의 사회적 공론화를 일으킬 기회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1982년 김득구 선수 사건과 우리 모두 알고 있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그리고, 2008년 세브란스 김씨 할머니 사건이 그것이다. 김득구 선수 사건 후 뜨거웠던 존엄사 논쟁은 더 깊어지지 못한 채 뇌사자 장기이식이라는 실용주의로 귀결되었고, 보라매병원 사건은 개인 생명권 강화를 의료계에 규범화하여 오히려 연명의료를 강화하였다. 세브란스 김씨 할머니 사건 때는 생명에 대한 논쟁을 부담스러워한 법원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범사회적 숙고를 건너뛴 채 그 저 신속한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으로 갈등을 무 마하였다[34].
한국 사회는 이제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를 통해 자신의 죽음이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현실에서 탈출(exodus)하고자 한다. 삶에서 죽음의 의미를 복원하는 문화적 토대를 만드는 과정을 무시한 채 다시 또 법과 규범으로 갈등과 혼란을 정리하려 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허위의 수렁으로 빠져 들 것이다. 이미 일부 국민은 스위스까지 찾아가 비극으로부터의 탈출(exit)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심층취재를 담은 어느 책 제목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라는 메시지이다[12]. 저자들은 탐사취재의 결론으로 그들의 탈출은 단지 고통으로부터 회피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서 철저히 개인의 주체성이 강탈되는 사회구조의 모멸로부터 탈출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도의 결정 주체들은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비극의 원인을 탐구하지 않고, 늘 피상적인 윤리논쟁을 반복하면서 규범 위에 새로운 규범을 더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이제라도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제도와 생명 윤리의 논의 방향은 비극을 피하기 위한 삶의 포기를 보장하는 쪽보다, 마지막까지 실존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가능성의 보장에 맞춰져야 한다. 기존 급성기 치료 영역에서 환자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해 주체성을 의사에게 위탁하고 생존을 의존하게 되지만, 생애말기 의료에서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생애말기에서 의료는 환자의 마지막 실존 무대를 점령하는 권력자가 아닌, 그 무대의 겸손한 조연이자 동료 그리고 친절한 무대장치와 소품 그리고 진실한 관객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 존엄과 행복에 대한 끈기 있는 논의와 깨달음 그리고 공유와 교육을 통해 새롭게 창출해야 할 죽음의 문화이며 위기를 넘어서는 진정한 ‘생의 도약(?lan vita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