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서구 사회에서 조력자살(assisted-suicide)과적 극적 자의안락사(active voluntary euthanasia)에 대한 논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1] 적극적 자의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시민들의 찬성 비율은 1981년부터 2008년 기간에도 꾸준히 증가하였다[2]. 이는 자기결정권의 확장과 더불어 사망이 가정보다 의료기관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3] 연명의료의 기술과 장비들의 발전으로 사망에 이르는 과정과 모습이 달라진 점[4]과도 관련이 있다. 비록 국가마다 허용하는 조건은 다르지만, 네 덜란드와 벨기에 등에서 적극적 자의안락사까지 허용되었고 캐나다와 미국의 일부 주와 호주의 일부 주 등에서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 합법화되었다[5]. 스위스는 적극적 자 의안락사는 금지되어 있으나 외국인의 의사조력 자살도 허용하고 있다[6].
국내에서는 안규백의원 외 12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조력존엄사법안’)’[7]에 대한 토론회가 2022년 8월 24일 국회에서 열렸다. 이는 2011년에 대한의학회가 연명치료중지에 대한 지침을 제안하였지만[8]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던 사회 분위기와 ‘연명의료결정법’이 의료 현장에 실제 적용 된 것이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보면 빠른 사회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안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의 의사조력자살 법제화에 대하여 아래 여섯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본론
사망이 초래될 수 있는 의료 상황에서 내린 환자의 결정은 실로 당사자가 가진 가치관의 총체적 반영으로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수혈로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환자가 자신의 믿음과 신념으로 수혈을 완강히 거절할 때도 그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며[9,10] 의사는 다른 대체 방법으로 접근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회복이 되지 않는 질병을 가진 환자의 감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해결 방안도 있어야 한다. 만약 그 고통이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환자는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의료인의 도움을 받는 자의임종(自意臨終) 방식을 원할 수 있다[11]. 문제는 그런 상황에 처한 환자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심리 및 신체 상황과 지적 능력으로 자신의 상태에 도움이 되는 의료 대안들이나 연관된 여러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자의임종을 결정하였는지 여부이다. 그리고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의료 및 공공 지원이 환자에게 제대로 주어졌는지 여부와 담당의사가 진료 과정 중 환자의 자율 결정이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도록 충분한 역할을 하였는지 등의 변수가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환자의 고통이 신체적 증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임종 돌봄의 부담을 가족이나 사회에 부과하게 된다[12]. 특히 가족에게 주어지는 부담으로 인하여 환자 스스로 자신의 삶의가 치를 낮추어 버리는 경우도 임상에서는 경험하고 있다[13]. 이 경우 담당의사는 신체적 상태 외에 가족의 부담 등을 고려하여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 중단이나 나아가 의사조력자살을 요청하는 환자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고심하게 된다. 환자의 자율성 존중은 의료의 핵심 가치로 의료진은 이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의사의 도덕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환자의 자율성도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14,15]. 자살과 달리 의사조력자살은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의사는 소속된 사회의 상황과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2]. 그러므로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자의임종 방식에 대한 바람이 존중받으려면 대상 및 방식과 시기 등에 대한 사회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의사조력자살은 환자의 온전한 자기결정권의 영역이 아니라 조력해야 하는 상대측과 협의가 필요한 협의 결정권 영역이라 할 수 있다[16].
이번 ‘조력존엄사법안’은 기존의 ‘호스피스·완 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에 포함되어 ‘일부개정법률안’ 형태로 지난 6월에 국회에 발의 되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를 규정 하고 ‘임종 과정’에 진입된 환자가 그 ‘연명의료’를 거절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으로,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안’은 ‘연명의료결정법’과 같은 맥락과 윤리 수준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뜻에 따라 무익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으로 그 행위의 의도가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어서[17] 환자의 자살을 유도하는 ‘조력존엄사’와는 사회 규범과 의료 조치 및 의료윤리 측면에서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조력존엄사’법안을 연명의료결정법에 덧붙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독립된 법안으로 발의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제안된 이 법안의 대상환자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가진 ‘말기환자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신청이 인용된 사람’이다. 이 법은 ‘신청이 인용’된 환자가 ‘담당의사 및 전문의 2인에게 조력존엄사를 희망한다는 의사표시를’ 하여 그 요청을 동의한 의사로부터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방법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허용하는 절차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조력존엄사법’안의 제안 이유에 제시된 2021년에 수행된 건강한 사람 734명을 포함한 성인 1,000명 대상 국내 여 론조사[18]에서 76.4%의 응답자들이 의사조력자 살의 법제화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신중히 해석하여야 한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유관 분야의 학자 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존엄사나 안락사 등과 같은 용어들에 대한 생각과 이해는 흔히 다르다. 안락사나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임종과 연관된 어려운 상황이나 부담은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그 절차나 과정 그리고 찬성하는 이유는 응답자 각각이 다를 것이다. 상기 여론조사 연구에서도 ‘무의미한 남은 삶 (30.8%)’, ‘좋은 죽음의 권리(26.0%)’, ‘고통 완화 (20.6%)’ 그리고 ‘가족의 고통과 부담(14.8%)’이 의사조력자살의 찬성 이유로 나타났다[18]. 남은 삶의 의미나 ‘좋은 죽음’은 사람마다 그 의미가 같 지 않다. 동일 연구자가 시행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에서도 죽음에 대한 생각과 교육 및 생활 수준 등에 따라 임종 돌봄에 대한 생각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19]. 그리고 통증과 고통은 같지 않다. 그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통증과 달리 고통은 객관화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절차에 대하여 사회가 합의하려면 환자의 관점에서 본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인식 및 욕구 조사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에 대한 사회 인식도 파악이 되어야 한다[20].
이 법안에는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력존엄사대상자 해당 여부를 심의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이 위원회에서 ‘말기환자 해당 여부’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있을 것’과 ‘신청인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 하고 있을 것’을 심의하게 되어 있다. 말기환자가 겪는 임종 과정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보편적으로 의료 현장에서 임종에 이르는 여정은 환자와 담당의료진이 변화되는 환자의 신체 및 제반 상황에 따라 협의와 합의로 진행된다[12,21]. 그 협의와 합의에는 환자가 호소하는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에 대한 담당의사의 개 별 판단이 포함된다.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제출된 서류로 ‘위원회’가 객 관적으로 잘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담당의사가 제공해야 할 서류 업무 부담이 클 것이다. 이는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환자가 자신의 임종을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임종 돌봄에 사용할 담당의사의 시간을 위원회의 승인을 받기 위한 서류 작업에 할애하게 하는 것이다. 미국 ‘Oregon’s Death with Dignity Act’에는 법률에서 규정된 대상환자들에게 그들의 자 의임종을 도울 약을 의사가 처방한 경우 Oregon Health Services에 처방한 죽음 약물들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되어 있고 담당 약사에게 그 처방약의 목적을 알리도록 되어 있지, 특정 위원회를 두어 대상 환자를 사전에 심사하지는 않는다[22]. 외국 인의 자국 내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스위스도 담당의사의 사후 보고 등으로 관리는 하고 있으나 위원회를 거쳐 사전 심의를 하는 절차는 없다[6].
그리고 임종 돌봄에 사용하는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행위를 규정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명의료중단과 같은 것이다. Physician-assisted suicide란 용어를 번역할 때도 조력존엄사라고 하는 것보다 의사조력자살이 그 행위의 의미를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의사로부터 임종을 유도하는 약물을 처방받아 환자 스스로 복용하여 임종에 이른다면 존엄이라는 가치를 내포한 ‘조력 존엄사’란 용어보다 ‘의사조력 자의임종’이라 하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의사조력자살보다 순화되어 들린다. 캐나다도 관련 법률의 이름을 ‘Canada’s Medical Assistance in Dying Law’[23]라 하였다.
임상윤리의 바탕은 환자의 상태나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의료 행위를 제공하는 것이라기보다 환자의 상황에 합당한 최선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최선의 의료는 환자를 보다 건강한 삶으로 회복시키거나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의료의 본질 가치에 바탕을 두고 환자의 바람을 존중하며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24]. 이때 시행되는 의료행 위는 그 시점의 의과학 및 윤리적 근거에 합당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진행된 말기환자에게 임종에 이르는 시간만을 연장시키는 의료 행위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환자나 환자 대리인의 뜻에 따라 중단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로 전환하는 것은 최선의 의료에 부합하며 의료인은 이를 잘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25].
그러나 의사조력자살은 치유자로서의 의료인의 역할과 상충이 되며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다. 의료 행위는 보편적으로 의료전문인이 특정 의료 행위를 환자에게 제안하고 환자가 동의함으로써 발생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진 말기 환자의 자의임종에 대한 의사의 조력 의무에 대한 판단도 이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환자가 자신의 임종을 도와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하는 경우로 의사마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고통 및 조력 의료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15,26]. 질병의 회복을 위한 보편적 의료행위와 환자의 죽음을 초래하는 의사조력자살은 비록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동기는 유사하나 추구하는 결과가 매우 상이하다.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할 때 자율성 존중 원칙 외 다른 중요한 윤리 원칙들과 균형 있게 판단하라는 권고도 있다[27]. 또한, 완화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 환자의 삶의 질과 가족들의 어려움을 개선시키는 반면 의사조력자살은 자칫하면 의사-환자 사이의 신뢰나 의료계에 대한 공적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우려가 있다[17]. 더구나 의사조력자살을 요청하는 환자와의 상담과 의학적 판단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정서적 소모가 커서 의료인들이 피하고 싶은 업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회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진 말기환자의 의사조력자살이 법에 허용이 되므로 의사는 그런 환자의 요청을 수락해야 한다고 강제하기는 어렵다. 반면, 의사가 자신의 양심과 가치 관에 따라 법으로 허용된 조력 임종 수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공공의료의 효율을 저하시 키고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견해도 있다[15]. ‘조력존엄사법안’에는 담당의사가 조력 존엄사 이행을 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의사 조력자살의 합법화가 추진된다면 그 시행 절차에 대한 의료계의 합의가 필요하다.
담당의사로서의 어려움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환자가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바람대로 의사조력자살을 요청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도 있다. 실제 온전한 자율성의 실현은 여러 요인들과 충돌하게 된다. 지적 능력이 저하되어 있거나 판단이 마비된 환자에서는 자율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의료진의 이해와 의료비 지불 능력과 가족들의 지지 그리고 법의 규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재택돌봄과 같은 유관 공공의료 보조시스템도 환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자율성은 한 개인의 변하지 않는 특질이라기보다 수시로 변화하는 인간의 동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치료의 중단과 같은 결정 시 흔히 자신의 질병 상태나 주위 상황의 변화에 따라 환자의 자율성도 변화되며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환자가 스스로 한 결정을 의료진에게 통보한 후 그 결정을 번복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환자의 의사조력자살 요청에 대하여 의사들이 동의하는 경우라도 환자의 자의임종에 대한 진정성이 변할 수 있어 담당의료진은 환자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환자와 협의하고 합의하여야 한다.
임종 돌봄을 위한 사회 기반 시설과 지원 제도와 담당 의료인들의 진료 수준은 좋은 임종 돌봄의 중요한 요건이다. 의사조력자살의 법제화는 비 록 논란이 있지만[28],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체계가 어느 수준까지 제공되고 난 후에 고려되어야 한다[29]. 좋은 완화의료는 의사조력자살의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30]. 좋은 완화의료의 뒷받침 이 없으면 의사조력자살이 일부 환자들에게 임종 돌봄의 부담을 회피하는 사회적 압박으로 작동할 위험성이 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위에 언급된 연구들에서도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적극적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9]. 2016년 1월 8일에 연명의료결정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6 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호스피스 돌봄 이용이 가능한 질환은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 흡기질환, 만성호흡부전, 만성간경화에 국한되어 있다. 이런 제도의 제약과 함께 호스피스·완화의료의 기반 시설[31] 및 국가 지원의 부족으로 임종 돌봄에서 소외된 말기환자들이 있다. 또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비록 말기 상태에서 연명의료 계획서를 작성하여도 호스피스·완화의료로 전환 되지 않으면 ‘임종 과정’에서만 환자의 뜻이 존중 된다. 그리고 진료비에 대한 부담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치료 중단의 중요한 요인이다[32].
의료 현장에서도 2018년 2월부터 시행된 연명 의료결정법에 따른 임종 돌봄이 제대로 자리를 잡 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한 수련의사들의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33]. 이는 2020년 사망한 국민 305,100명 중 의료기관에서 임종하는 비율은 75.6%이며, 이중 만성질환으로 의료기관에서 임종한 환자는 20만 명으로 추 정되나 2020년에 ‘연명의료중단등 결정이행서’를 작성한 환자 수는 54,659명으로서 결정이행서에 따른 임종 돌봄 사례 비율이 낮은 것으로도 추정 이 된다[31,34].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교육이나 접근 방식에 대한 준비는 의료인들조차 매우 부족하다. 죽음 전반에 대한 의료인들의 교육 수준은 중요하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적극적 자의안락사나 의사조력 자살 환자들의 기저 질환들이 다양하며[35] 이들 환자의 고통 수준이나 환자의 자율성에 대한 판단을 일차적으로 담당의사가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시아 중환자진료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다기관연구에서 국내 중환자의사들은 연명의료중 단에 대하여 싱가폴 등과 같은 다른 나라 중환자 의사들에 비하여 훨씬 보수적 태도를 보였다[36]. 더하여 Belgium의 보고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단 의사조력자살이 합법화되면 시행 건수는 매년 증가할 수 있어[37], 이에 대한 적절한 감독 체제도 의사단체가 중심이 되어 유관 단체들과 협의하여 준비하여야 하는데 이는 짧은 시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말기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하고 최선의 이익을 보장’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의학적으로도 구분과 예측이 어려운 질병의 말기 상태[38]를 ‘말기’와 ‘임종 과정’으로 나누어 말기에는 호스피스·완화 의료를 적용하고, 연명의료중단 결정은 임종 과정에서만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조력존엄사법안’의 제안 이유에도 기술된 것과 같이 연명 의료 거절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사망에 임박한 상태’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 이는 사전연명의료의향 서가 임종 과정을 환자의 의지대로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임에도 그 권리를 임종 단계에서만 허용한 것이다. ‘조력존엄사법안’에서도 대상 환자를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가진 ‘말기’환자로 확대하였다.
또한 이 법에서는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대리인의 자격을 배우자와 일촌 직계가족 등 가족관계로만 한정하였으며 무연고자에 대한 절차는 제시하지 않았다. 환자의 자율성은 반드시 스스로 결정해야만 작동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고 환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여러 제한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와 삶을 잘 이해하는 제3자에게 결정권을 양도하여서도 작동될 수 있다[10,39]. 한 연구에서 가족중심 문화를 가진 동아시아권에 서도 연명의료에 관한 결정은 환자 본인이 하거 나 환자의 배우자나 자식들과 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0]. 반면, 의료 현장에서는 배우자나 직계가족이지만 적법한 대리인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를 겪고 있다. 또한,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고 2022년 8월에 게시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비친족 가구원이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고 하므로 적법한 대리인을 배우자와 직계가족 등의 가족관계들로만 한정한 것은 제고되어야 한다. 비록 직계가족이 아니더라도 환자가 원하는 의료 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연고자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그 대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의료대리인으로는 환자의 가치와 바람을 잘 이해하며 환자와 이해상충이 없는 이가 바람직하다[39].
그리고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설치된 기관과 협약을 맺은 의료기관에서만 사전연명 의료의향서 작성 여부의 확인이 전산으로 가능한 데 임종은 그런 의료기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료기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여부를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확대하여야 한다. 더하여, 연명의료결정법의 절차 서식이 복 잡하여 의료진이 행정 처리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판단서’와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이행서’는 표준화된 의무기록으로 대 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명의료계획서’, ‘환자의사확인서’, ‘환자가족진술서’와 ‘친권자 및 환자가족의사확인서’ 서식도 하나로 통합하여 불필 요한 서류 작업 시간을 줄여 담당의사가 환자 곁에 더 머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번 ‘조력존엄사법안 토론회’와 같은 민감한 사회적 논점은 일회성 행사로 그치면 안 된다. 영국의 NHS Benchmarking Network에서 주관하는 ‘The National Audit of Care at the End of Life’[41]의 보고 활동과 같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의료 현장에서 경험하는 임종 돌봄의 문제 점들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관련 연구들을 취합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명의료 분야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말기환자들의 생의 마무리 과정에서의 자기결정권 허용 범위에 대한 논란은 끊이 지 않을 것이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 관한 제 반 업무는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서 맡고 있다. 새 로운 기구의 구성보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좋은 죽음에 관한 업무도 관장할 수 있는 조직을 두 어 인력과 예산 지원을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이런 국가적 윤리 쟁점들은 대통령직속위원회 인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의 논의도 필요하다. 제2기와 3기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연명의료 결정 제도를 추진하였었다. 최근 국가생 명윤리심의위원회를 보건복지부 산하 위원회로의 변경을 추진한다는 기사가 있었다[42]. 의사조력 자살 등과 같은 생명윤리 사안은 보건복지부만의 영역은 아니다.
Ⅲ. 결론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소수 말기환자들을 위한 사회제도나 의료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흔히 연명의료중단과 함께 시행되는 종말진정(terminal sedation)만으로는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말기환자들은 있다. 그 종말 진정조차도 우리 의료계에는 잘 수용되어 있지 않으며[43] 유효하게 처방이 되지 않아[44] 그런 환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 외에는 다른 출구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인자살률이 OECD국가들 중 가장 높은 우리 사회에서 바람직한 의사조력자살을 위한 사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현 상태로 법제화된다면 이 법이 노인 자살이나 임종 돌봄의 사회 비용 경감의 또 다른 방식으로 오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조력자살이 우리 현장에 적용되려면 비용 등의 이유로 스스로 돌봄이 불가능한 말기환자들에게 가족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는 사회 압박 기제로써 작동되지 않도 록[13] 호스피스·완화의료의 확대와 같은 적정한 돌봄 지원이 보다 확충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기 환자들을 위한 의료기관에서의 완화의료와 영적 지지에 대한 교육과 실천도 개선되어야 한다[45].
‘조력존엄사법’은 ‘연명의료결정법’과 분리되어 고려되어야 한다. 두 법은 성격상 합치될 수 없다. 만약 하나의 법으로 만들어진다면 환자 측은 무익한 연명의료중단조차도 의사조력자살로 오해할 수도 있고 의료인들은 연명의료중단 결정과 의사 조력자살의 경계를 모호하게 받아들일 위험도 있다[46].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특별한 말기환자들을 위한 자의임종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는 지속되어야 한다. 의사조력자살은 사회 합의가 우선이며 이를 바탕으로 의료와 법은 관련 행위 규범을 규정하여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대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가 말기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으로 시작하여 중증 치매나 지속적 식물상태의 환자 등으로 연명의료중 단의 범위를 사회가 합의하여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도 연명의료결정법의 ‘말기’와 ‘임종 과정’의 구분을 없애고 말기 상태에서부터 집중 치료 거절 등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확대하는 법률 개정부터 시작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