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은 1914년 미국 코네티컷 (Connecticut)주에서 치과의사 폰즈(A.C. Fones)에 의해 탄생하였다. 폰즈는 당시 아동의 구강건강향상을 위하여 구강보건지식 전달과 검진 및 예방처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치위생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게 되었다. 폰즈가 만들고 운영한 프로그램 졸업생들이 치과위생사의 시초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폰즈 가치위생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기 이전에 치과 진료실에 여성 보조원들이 있었는가’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 연구는 그러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119세기 말 대부분의 치과의사는 치과 진료실에도 보조원(assistant), 혹은 치과 간호사(dental nurse)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치과진료실에 치과 간호사 (dental nurse)라 불리는 보조원(assistant)이 상주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당시 치과의사들은 대부분 혼자 진료했다. 치과 보조(dental assisting)는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폰즈는 치과 보조원, 혹은 치과 간호사가 필요함을 주장한 치과의사 라이트(C.M. Wright)를 치위생의 미래를 본 선구자로 칭했다. ‘치과 보조원’이라는 직업조차 없던 시절에 진료실에서 치과의사와 함께 일하는 치과위생사라는 하위전문가(sub-specialist) 그룹의 필요성을 주장한 라이트가 혁신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
이와 같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익숙한 많은 것들이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존재하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았으며, 혁신적(innovative)이라 불리 기까지 했다.[1] 구강 위생(oral hygiene)1)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고대의 구강 위생은 종교적 의식이자, 주술적 의미로 행해졌다. 이후 구취를 억제하고 치아를 하얗게 만드는 것이 치아를 깨끗이 하는 행위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현대의 개념과 같이 구강 위생과 구강병의 예방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었다. 구강 위생의 관점 변화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오늘날 치과위생사의 탄생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관련 주제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치위생 정체성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던 중 치위생 역사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치위생과 관련한 역사적 흐름과 맥락 속에서 혜안을 찾기를 희원하였다. 고대의 구강 위생부터 시작하여 치과위생사의 탄생까지 치위생 역사의 단추를 끼워 보는 것은 앞으로 치위생학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탐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과거를 이해하지 않고 미래를 논한다면 맥락 없는 이야기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맥락을 배제한 ‘치과위생사는 폰즈에 의해 탄생했다’라는 표현의 단편적인 치위생 역사 교육은 치과위생사 직업이 가진 전문적 수요와 시대적 요구 및 의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박탈한다. 이는 치과위생사들 이 피동적 직업의식을 갖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본 논문에서 치과위생사들에게 치과의료현장과 지역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 수행이 필요함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속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치과위생사(dental hygienist)’는 어느 날 갑작 스레 폰즈의 머리속에 떠오른 개념이 아니다. 당시 공중보건의 시대적 흐름과 치의학 전문화 노력의 일환인 치위생운동(dental hygiene movement)을 통해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이 탄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의 탄생을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폰즈가 치위생 교과과정을 만들기 전 치의학의 흐름과 건강개념,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문헌고찰을 통해 치위생의 뿌리는 인류의 기원과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인간의 구강 청결 혹은 구강 위생과 관련된 행위, 풍습, 전통, 관념, 미신 들을 망라해 보도록 한다.
문헌고찰을 통해 과거 구강 위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구강 위생 및 치위생과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식편압입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적 의무에 의해 이를 쑤시고 입을 헹궜다. 로마 시대 이후에는 구강 세정을 통해 구취를 제거하고 하얀 이를 얻으려 했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구강 위생은 청결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과 하얀 치아라는 미의 기준 충족을 향한 수요가 동력이 되어왔다. 18세기까지 구강청소는 대게 구취제거와 치아미백을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구강청소가 구강상병의 예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해는 인류가 현미경을 통해 치면세균막과 구강세균을 직접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구강청소와 구강질병의 연결고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20만년 남짓한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방적 관점의 구강 위생 혹은 치위생이 시작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오늘날 치의학과 치위생학은 과거 “구강관리라는 용어가 의미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해졌다.”[3] 표면적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 행위양상은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며 행위에 부여된 과학적 정당성과 행위 결과에 대한 인식이다. 18세기까지 이발외과의들 및 치과의사들에 의해 행해지던 구강청소는 오늘날 그 행위의 구체성들이 변화하면서 ‘예방관리’, ‘잇솔질교육(tooth brushing instruction)’, ‘잇몸관 리’가 되었다. 이런 과학적 정당성에 힘입어 오늘날 스케일링과 잇솔질교육을 위시한 예방업무는 치과위생사 업무 중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위생사 업무 범위 확립과 정에 관한 역사적, 그리고 철학적 고찰이 부족한 현실이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고찰을 통해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루며 오늘날 치과위생사의 역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가를 탐구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누구의 필요에 의해 어떻게 인간의 구강 위생 행위가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치위생의 내러티브’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칫 진료협조와 예방으로만 고착될 수 있는 치위 생 패러다임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치위생 패러다임에 새로운 시각이란 치과 임상 현장에서 치과위생사의 역할 확장을 의미한다. 치과위생사가 치과의료의 돌봄 제공자로서 역할을 확장한다면, 현대 치과 의료 현장의 인간 소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치과위생사가 고객3) 혹은 환자의 삶 속에 보다 깊이 관여하여 치과의료의 공동의 선을 추구한다면, 인간을 치과 진료 현장의 중심에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치과위생사들 스스로 업무 인식의 범위 확장이 필요한데, 구강 위생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과거 구강 위생 행위가 우리 삶의 문화, 풍습, 환경, 그리고 종 교적 관습들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 진료 협조에 제한되어 있는 치위생의 정체성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향후 치위생 정체성과 윤리의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이 열리기를 희구한다. 치과 의료는 실천의 영역이다. 그 속에서 치과위생사의 정체성과 윤리는 ‘관계 맺음’의 측면이 크다. 치과 위생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법에 따라 치과 의사와, 그리고 고객 또는 환자와 맺는 관계의 양태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윤리 논의의 범위가 달라짐은 물론이다. 본 연구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인간의 구강 위생에 관한 태도와 생각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했다. 이러한 우리의 탐구가 교육 현장, 임상 현장, 그리고 보건의료 현장의 치과위생사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하기를 바란다. 구강 위생 이 인간의 일상 및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들은 치과 임상 현장에서 치과위 생사의 업무범위 및 정체성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서사적 역량을 통한 그 가능성의 구체적 실현에 대해서는 이어질 연구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모든 역사서술은 서사에 해당한다고 했다. 최성철은 논문 “역사와 서사”에서 역사를 “마치 서사가 아니고 싶어도 서사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 고난 장르”로 구분했다.[4] 치위생의 역사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치위생’이라는 학문 혹은 분야 자체의 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잠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토도로브(Tzvetan Todorov)의 서사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치위생의 서사적 접근이 한층 흥미로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Poetica)』에서 사건의 배열인 ‘플롯(plot, 그리스 원어로는 mythos)’이 서사 구조의 중심적 요소라고 주장한다.[5] 토도로브를 위 시한 현대 구조주의 서사 이론가들은 서사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요소로 ‘무엇이 이야기되고 있는가 (what is narrated)’를 들었다. 이 개념은 ‘시간적 구조’와 ‘상태의 변화’를 갖고 있는 모든 콘텐츠를 서사에 포함한다고 한다.[6] 치과위생사는 1800년대 후반 시작된 ‘치과 예방 운동(dental prophylaxis movement)’ 혹은 ‘치위생 운동(dental hygiene movement)’의 한 지류로 파생된 직업이라는 점에서 그 탄생부터 나름의 플롯과 콘텐츠를 지닌다. 이러한 치위생의 태동 이전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은 치위생의 근본이 되는 철학적 기틀을 꿰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II. 연구대상 및 방법
본 논문의 주된 연구대상은 구강 위생 혹은 치 위생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특정 역사적 시점과 지역의 풍습, 문화, 행동양식 등을 포괄한다. 본 연구의 주된 연구 방법은 문헌 고찰이다. 우리는 문헌고찰을 위한 사료(史料) 수 집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어려움을 마주했다. 첫째, 구강 위생의 역사를 연구한 자료가 매우 부족했다. 문헌 수가 몇 개 되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온라인상에 제공되지 않았다. 지리적 여건상 미국 여러 대학의 서고 탐방이 여의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둘째, 인류 구강 위생의 역사를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문헌이 없었다. 이는 치의학도 마찬가지였다. 거시적 시각에서 구강 위생으로 시작하여 치위생의 역사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훑어 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는 지엽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자료수집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치위생 사료들을 한데 모아 연대 순으로 배열하고 그 속에서 공통된 시대적 흐름을 찾아 구강 위생의 역사적 인과성을 기술하고자 했다. 논문의 본 절에서 우리는 단순한 연대적 기술 이상으로 역사적 사건들 간의 관계조망을 시도한다. 이 과정을 통해 선조들의 구강 위생에 대한 생각을 읽어내고, 치의학의 역사 혹은 구강 위생의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특정 사건의 맥락적 의미파악을 염원했다.
III. 연구결과
고대 사람들에게 구강과 치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치아는 세계 여러 문화에서 건강과 활력의 표상이었다. 치아는 미용 목적으로 충전되거나 장식 세공을 거치는 등 다양하게 훼손된 기관이기도 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몽골인, 아프리카인, 파푸아인, 말레이인, 아메리카 인디언, 아즈텍인, 마야인 등에 나타났다. 솔로몬 왕은 시바 여왕의 외모에 경의를 표하며 그녀의 치아를 “털을 갓 깎고 씻긴 양 떼”에 비유하기도 했다. 로마 시인과 문인은 치아를 여성의 미모를 아름답게 하고 연설가의 목소리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여기기도 했다.[3]
그렇다 하더라도 음식물이 치아 사이에 껴서 발생하는 불편감은 해소되어야 했을 것이다. 치간공극의 탐침은 세련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인류의 오래된 행위들 중 하나다.[7] 인류학자들은 약 2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 사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 두개골 화석에서 압입된 식편을 빼기 위해 이를 쑤신 증거를 찾았다.[3] 치간골의 심각한 소실이 관찰된 것이다. 아마도 이쑤시개는 그 형태와 관계없이 식편압입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었을 것이다.[8] 한 현대 인류학자가 “이를 쑤시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습관 중 하나”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쑤시개는 여러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발견되는 역사 속 구강관리용품이었다.[3] B.C. 3000 년 메소포타미아 고분에서 이쑤시개가 발견되었다.[9] 고대 니니베(Nineveh)4)에서 약 20마일가량 떨어져 있는 테페 가우라(Tepe Gawra)에서 고고학자들은 4천 년 전 화장품 세트를 발견했는데, 화장도구, 귀이개, 섬세하게 다듬어진 이쑤시개가 포함되어 있었다.[10] B.C. 3500년경 닝갈 사 원(Ningal temple) 기록에서 귀고리, 족집게, 이쑤시개로 구성된 화장실 세트(toilet set)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뉴욕(New York)에 위치한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에는 중국의 화장품 세트가 전시되어 있는데, 족집게, 귀이개와 함께 이쑤시개가 들어있다.[10] 링(M. E. Ring)은 고대 로마의 상류층은 위생 관념이 철저한 현대인들보다 더욱 위생에 신경을 썼을 것이라 기록한다.[10] 손님이 오면 숟가락과 포크 외에 정교하게 장식된 철제 이쑤시개가 함께 제공되었다. 때때로 금으로 만들어진 이쑤시개가 제공되기도 했는데, 집주인의 선물로 손님들은 사용 후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코스 요리를 먹을 때는 중간중간 이를 쑤시는 것이 적절한 행동이기도 했다.[10] 많은 일회용품, 화장품 등이 발굴된 이집트 무덤 속에서 구강위생용품이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보존된 파피루스에 근거하면, 고대 이집트에 음식물 잔사 제거를 위한 칫솔과 치약이 존재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9]5)
위의 증거들은 대부분 현대 고고학자 및 인류학자들이 현장 발굴을 통해 추측한 것이다. 구강의 세정에 관해 인류가 직접 기록한 흔적은 기원전 1,50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3]6) 이집트의 귀족들에게 치아 세정은 아침 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입 헹구기’라는 관용구는 아침 식사를 나타내는 표현과 동일하게 여겨졌다.[3] 노예들이 귀족들의 구 강 관리를 도맡아 했다. 따라서 당시 귀족들이 구 강 관리에 소홀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나, 이 집트 미라를 관찰한 결과 치아 우식과 농양이 귀 족들에게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유층은 단당류 섭취 증가, 식편압입이 유발되는 음식 섭취로 인해 서민들보다 치아 문제의 발생 가능성 이 높았던 것이다. 니니베에 있는 야슈르바니팔 (Assurbanipal)왕의 문고에는 기원전 7세기 신앗 시리아시대 주술사들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그 중 우라드나나(Urad-Nana)라는 주술사가 앗시리 아 앗사르핫돈(Assarhaddon, 기원전 681-699 재 위)왕에게 보낸 편지 중에 바빌로니아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들은 구강과 치아 청소만은 보건법 이 아닌 종교적 관습으로 잘 행해지면 종교의식에 필수적인 것의 하나이다.”라고 기술하며 구강 청소에는 물을 사용하며 수행중인 종교인은 성수의 용기(agubbu)에 항상 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10]
치아가 가진 주술적 혹은 미신적 상징이 치아의 본래 목적인 저작을 통한 소화작용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때문에 구강 청결은 종교적 의식의 일환이기도 했고,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의미로 행해지기도 했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러한 의식이 인도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인도의 힌두 만신전의 상위 신의 이름을 딴 『Vishnu Veda』7)의 전반부 여섯 장은 치아를 세정하는 의식에 대해 묘사한다. 단타카슈타(Dantankashtha) 라고 알려진 여러 방향 관목의 잔가지로 만들어진 도구의 끝을 치아에 대고 비볐다고 한다.[3] 아 르트레야(Artreya)시대8) 수슈루타상히타(Susruta Samhita)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수슈루타상 히타』에서 위 『Vishnu Veda』의 구강 세정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이를 닦아야 한다. 칫솔은 아무 초목이나 신선한 잔가지를 사용해도 좋으며, 길이는 손가락 12마디 정도로 하고 두께는 새끼 손가락 두께면 적당하다.”[3] 그는 이를 닦을 때 꿀과 기름 등을 넣은 세정제를 사용할 것을 추천했다. 이집트와 인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아침’에 이 닦는 것을 강조한 듯하다. 이는 오늘날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오늘의 보편적 상식은 음식물 섭취 후 세정을 위하여, 혹은 잠자리 들기 전에 밤 사이 치아 우식 유발 세균 활동의 감소를 위하여 이를 닦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입을 헹구는 등의 구강 세정 행위를 경건하고 상쾌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의 한 종류로 행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구강 세정은 종교 의식 전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의미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석가(기원전 500년경)는 제자들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보리수의 작은 가지(치목)를 이용하여 치아를 청결히 하도록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불전으로 독경하기 전에도 손을 씻고, 위생을 청결하게 할 것을 지도했다. 당시 승려 조우9)는 인도에서 수행을 하고 중국에 돌아가 치목을 사용하여 이를 청소하는 습관을 전파했다. 중국에서는 주로 버드나무의 작은 가지를 사용했다.[9] 페르시아의 이슬람 교도(Mohammedans)는 종교적으로 구강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스왁(miswak, siwak, sewak)10)이라는 나무를 탄산수소나트륨 (sodium bicarbonate)이나 물에 충분히 담가 불려서 섬유질이 칫솔모처럼 되도록 한 후 한쪽을 묶 어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12]
이를 쑤시는 행위가 심신의 안정을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이물질 제거에 쓰이던 초기의 원시적 이쑤시개는 점차 향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로 바뀌었다. 이쑤시개는 구강을 청결히 해줄 뿐 아니라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2] 또한 1785년경 고고학자들은 이집트의 바빌로니아인들 사이에서 죽은 사람의 구강을 세척하는 장례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12]
로마시대에 들어서며 구강 청결을 건강의 관점에서 기술하려는 시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건강개념은 오늘날의 건강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로마시대 의사 셀수스(Aulus Cornelius Celsus)의 1세기 의학 논문인 “De Medicina”는 치의학을 중요하게 다 루지 않지만, 입을 헹구는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있다.11) 셀수스는 “아침에 일어나서, 겨울이 아니라면, 입은 다량의 맑은 물로 헹구어져야 한다.” 고 했다.[13] 셀수스는 완벽히 건강하고 강한 사람(perfectly healthy and strong people)은 이렇게 입을 헹굴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13] 그렇다면 당시 완벽한 건강의 기준은 무엇인가. 또한 건강한 사람은 입을 헹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셀수스의 근거와 그가 전제한 건강 개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치과의사이자 치의학사가 구에리니(Vincenzo Guerini)는 “마치 구강 위생에 대해 지식이 없는 흑인들이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있듯,12) 로마시대에도 우식과 기타 구강 질환을야 기하는 구강내 병원균과 싸울 수 있는 타액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완벽히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라고 해석한다.[13] 그러나 본인의 해석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구에리니는 이와 관련하여 셀수스의 저서들을 탐색했는데, “셀수스가 질병의 원인을 시민의 덕성과 연관해 암시한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고 후술했다. 셀수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건강할 수 있었던 이유로 방 종하고 나태하지 않은 그리스 시민의 덕성을 들었다. “방종, 나태와 같은 악덕은 오늘날 복잡한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악(evil)을 불 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 셀수스는 나태함을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듯하다.[13]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perfectly healthy’라 함은 실제로 완벽한 건강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시민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 완벽한 덕성을 지닌 자라면 구강 위생도 필요 없다는 것이 당시의 견해였다.
셀수스 이후 고대 로마의학에 영향력 있는 저술을 남긴 이는 플라이니(Caius Plinius Secundus, 혹은 Pliny)다. 그는 Natural History라는 37권 짜리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25번째 책의 챕터 1056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와인으로 입을 헹구면 구취제거에 효과적이라고 기술한다. 더불어 치통을 피하기 위해 아침에 맑은 물로 여러 번 입안을 헹구면 좋은데, 홀수 번으로 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이는 미신적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13] 이는 북아메리카 부족들이 치아 상실을 막기 위해 유성을 보면 침을 뱉으라는 조언하고, 평생 치아를 튼튼히 지키려면 녹색 뱀을 잡아 목과 꼬리를 잡아 수평으로 길게 늘여 일곱 번 앞뒤로 움직 인 뒤 놓아준 뒤 사흘간 소금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3] 플라이니는 토끼 머리의 재가 좋은 치약으로 사용된다고 기록했다. 감송나무가 첨가되면, 이는 구취를 줄인다고도 했다. 또한 치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당나귀의 우유나 동물의 치아의 잿가루가 유용하다고 기록했다.[13] 이 기록은 튼튼한 동물의 치아를 먹으면 튼튼해진다는 미신적 의미가 포함된 것 같은데, 치아의 기화점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과연 동물 치아의 잿가루를 먹을 수 있었을지는 의심해 볼 만 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15세기 사람들은 성 아폴로니아의 유골이 강력한 치통 예방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3]
2세기 중반 로마에서 명성을 얻게 된 그리스의 내과의사 다모크라테스(Servilius Damocrates)는 갈레누스(Claudius Galenus, Galen)에 의해 재조명되었는데, 갈레누스에 의하면, 다모크라테스는 치아 청결이 치아와 잇몸의 질병을 피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함을 이야기했다고 한다.[13]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로마의 의사 아키제네스(Archigenes)는 병소에 약을 바르기 전 치아와 우 식 와동의 세정을 추천했다.[13][16] 로마시대에 Tooth-cleaning 가루는 널리 퍼져 있었다.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갈수록 값이 비싸졌다. 동물의 뼈, 계란 또는 조개 껍질 등 다양한 재료들을 첨가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재료들을 구워서 꿀과 섞은 뒤 으깨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재료들은 화려하긴 하나 미신적인 요소가 많았고, 럼주와 질산칼륨 등의 지혈제 등이 첨가된 것으로 보아 치아를 청소하고자 하는 욕구 못지않게 튼튼한 치아를 향한 욕구가 있었다고 보인다.[17] 몇몇 문헌에서 로마인들이 ‘nitrum’이라고 칭하는 성분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아마 탄산칼륨이나 탄산나트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로마인들은 nitrum을 태워 치아에 문질렀는데, 변색된 치아의 원래 색을 회복하기 위해서 행해졌다고 한다.[17]
이슬람교 문헌에서도 구강 세정에 관한 언급이 남아있다. 570년경 Mecca에서 태어난 모하메드 (Muhammad)는 아랍세계에 기본적인 구강 위생의 개념을 이슬람 종교를 통해 소개했다. 코란에는 기도 전 목욕을 다섯 번 하는 의식은 강제적인 의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목욕은 입을 세 번 혹은 열다섯 번 헹구는 것을 포함했다. 아랍 세계의 구강 청결 의식은 18세기 후반에도 계속되었다. 영국의 여행가 알레포(Aleppo)는 1700년대 후반 Syria에 얼마간 머물렀는데, 이슬람 가정의 저녁식사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긴 의자에 앉아 구강과 손을 씻기 위한 물과 비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7] 종교적 기원의 이닦기는 장례풍습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매장 전 시신의 검지손가락을 천으로 감싼 뒤 그 손가락으로 고인의 치아를 조심스럽게 닦는 것이다.[17]
구취 제거 또한 오래 전부터 다뤄진 구강 위생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구취는 유대인의 탈무드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문인들에 의해 수천년에 걸쳐 여러 문헌에 등장해왔다. 이슬람교는 상쾌한 입냄새를 좋은 구강 위생의 맥락에서 이해하기도 했다. 이슬람교 선지자 모하메드는 자신의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 때문에 사원에 집회를 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8] 치아를 청결히 하며 구취를 관리하는 것은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필요하기도 했다. 로마 시인 오비드(Ovid, B.C. 43-A.D.17?)는 그의 저서 『Art of Love Making』에서 소녀들이 매력적인 치아를 원한다면 잇솔질을 해야 한다고 기술했다.[12] 플라이니는 향기로운 호흡(to sweeten the breathe)을 위해 치아와 잇몸을 양털과 꿀로 문지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기록한다.[13] 그는 또한 구강청결제로 목욕 소금 (salt bath)을 권장했다.[18]
『동의보감』도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口臭)”에 대해 다루며 구체적인 약제까지 제시했다. 동의보감에서는 구취의 원인으로 네가지 정도를 제시했다. 첫째, “위(胃)에 열(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허화(虛火)나 울열(鬱熱)이 가슴 속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섭취한 음식물 때문이다. 넷째, 병으로 인해서다.[19] 구취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분류는 하우(Joseph W. Howe)의 1878년 서적 『The Breath, and the Disease Which Give IT a Fetid Odor. With Directions for Treatment』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하우는 구취의 원인으로 감정, 소화불량, 불량한 구강상태, 감기, 그리고 미네랄 독 등을 들었다.[20] 이중 서양과 동양에서 모두 감정상태를 구취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감정과 구취의 연관을 생각해 본다면, 스트레스 상황에서 교감신 경의 활성화를 통해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긴장상태 혹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입이 마르고, 이로 인해 구강건조가 발생하여 구취가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구취에 관한 기록은 다양하다. 윈브란트(James Wynbrandt)는 저서 『The Excruciating History of Dentistry: Toothsome Tales & Oral Oddities from Babylon to Braces』에서 17세기에는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창구로서 구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술했다. 윈브란트는 “심지어 과거에도 왕이나 왕비가 아닌 이상, 구취는 이성을 떠나가게 할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구취 제거에 관한 17세기 문헌을 제공했다. 1613년에 출판된 『The English Mans’ Treasure』은 구취 제거를 위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구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식초물로 입안을 행군 뒤, 유향나 무를 씹어라. 그리고 나서 입안을 아니스13) 씨앗, 민트, 그리고 와인에 젖은 정향나무를 섞어 달인 즙으로 다시 헹궈라.”[3]
치아 미백 또한 주요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플라이니는 로마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치아의 아름다움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기술했다. 로마인들은 치아 미백을 위해 치약이나 치아파우 더 등을 사용했다. 플라이니는 구강청결제로 목욕 소금(salt bath)을 권장했다.[21] 근현대시대 전까지 유럽의 가정집에는 칫솔뿐만 아니라 집에 칫솔을 걸어 둘 화장실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발외과의사들에게 치아 청소를 맡겨야 했다. 이발외과의들이 이쑤시개와 옷조각으로 치아의 청소를 해주었다. 치아를 긁어낸 뒤에 질산에 담가 둔 막대기로 치아를 닦았다. 치면이 하얗게 되는 미백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이는 치아를 상당히 하얗게 만들었는데, 치아의 법랑질을 탈회시키는 원리로 적용되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이런 이발외과의들에 의한 화이트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1653년 출판된 『The Jewel House of Art and Nature』에서 상세히 다루었다.[3]
16세기에도 서구 세계에서 개인 위생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재위 1558년-1603년) 한 달에 한번 목욕을 했다고 알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 청결은 당시 문헌에서 심심찮게 강조되었다. 극작가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1577년 그의 연극에 “칼로 이를 쑤시지 말지어다. 손으로도 쑤시지 말 라. 막대나 깨끗한 것으로 쑤셔라. 그렇다면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쑤시기 에티켓에 대한 구절을 포함하기도 했다.[17]
비슷한 시기 외과의사 파레(Ambroise Pare)는 반드시 식사 후 입을 물과 와인 혹은 식초를 섞은 물로 헹궈야 한다고 했다. 음식물 잔사를 씻어내야 치아가 부패하지 않고 숨쉴 때 악취가 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그는 치석으로 추정되는 물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파레는 흙 같은 노란색 물질은, 마치 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저작을 하지 않을 때 생기며, 치아를 청결히 하고 싶게 만들 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이어 파레는 “이 성분은 치 아를 부식시킨다, 마치 녹이 철을 부식하는 것처럼. 치아를 작은 기구로 문질러 떨어뜨리는 게 필요하다. 치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연마제로 문지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치석 제거술과 비슷한 맥락이다.[13] 이후 18세기까지 구강 위생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7세기 들어 teeth cleaning은 심미, 특히 여성 들의 미모 유지 방법으로 기술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화장품에 함유된 각종 중금속과 수은은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수은은 치아를 파괴했다. 수은에 의한 치아 변색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수은이 치아를 까맣고 지저분한 색으로 변색 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치아를 깨끗이 하는 다양한 방법이 소개되었다. 리비에르(Riviere)는 황산에 담근 나뭇가지로 치아를 비비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 방법은 치아를 하얗게 할 뿐만 아니라, 충치로부터 보호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 거는 만약 치아가 더럽다면, 황산염의 영혼이 치아를 맑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비에르는 이 주장의 근거를 실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16세 기초 Verona의 Pauda의과 대학 교수였던 몬타노 (Giovanni Battista Montano)의 저서로부터 찾았다고 했다.
몬타노는 그의 저서에서 어린 시절 로마에서 그래카(Maria Greca)라는 여인과의 이야기를 기술하였다. 몬타노는 30년 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전과 같은 그녀의 미모에 놀라며 미의 유지 비결을 물었다. 그래카는 매일 아침 vitriol(황산아 연)을 치아와 잇몸에 바른 것이 그 비결이라고 했다.[13] 리비에르는 담뱃재를 치아 청소에 추천하기도 했다. 리비에르의 담뱃재는 이전에는 거론되지 않았던 추천 재료였다. 또한 그는 부지런한 치아 청결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매 식사 후 치아 사이 작은 틈에 있는 음식물 잔사를 와인과 함께 헹구어 내야 한다고 하였다.[13]
나폴리(Napoli )의 의사 무시타노(Carlo Musitano, 1635-1714)14)도 치아 청결에 대해 주장했다. 그러나 그도 예방의 관점이 아니라 구취, 혹은 미의 관점에서였다. “그는 진주같이 하얀 치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악취가 진동하고 치석으로 뒤덮인 까맣고 시퍼런 치아보다 더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더러운 치아는 사람의 외모를 부패하게 하고, 그 외모를 쳐다보는 사람을 역겹게 한다,”고 했다.[13][22]
서양에서 백옥 같은 치아에 대한 갈망은 18세기로 이어진다. 영국 런던의 패로넷(David Perronet)은 방혈과 치통 치료를 전문으로 다루었는데, 그는 “만능 치약”을 만들어 “검은 이를 백 옥같이 희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3] 치의학사가 폴리(Gardner Foley)는 유명한 오스트리아 정치가였던 카티즈-르트버그(Von Kauntiz-Rietberg) 공작의 잇몸 세정 광경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잇몸 세정을 위해 주머니에 대 략 백 가지 정도의 도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치아 앞뒤를 보기 위한 온갖 종류의 거울, 연마용 철판, 펜치 등이 있었다.”고 했다.[3]
18세기 미국의 한 언론은 뉴욕의 총독 코스비(William Cosby)를 공격하기 위해 구취를 언급하기도 했다. 코스비에 대한 비판 항목 중에는 그의 구강 위생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론은 총독이 불결한 입과 역겹고 망가진 치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3] 1767년 Boston Evening Post에 개제된 베이커(John Baker)의 글에는 치약이 언급된다. 그는 이 치약으로 치아 치 은의 모든 질병과 구취에 대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3] 미국 초기 치의학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펜달(Benjamin Fendall) 박사는 1776년 8월 15일 Maryland Gazette에 “어떤 사람들은 치아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눈, 그리고 세상의 예의와 품위의 시각에서는 불 결함과 나태의 표상으로 보일 뿐이다. 얼굴 표정의 가장 중요한 장식품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더럽고 썩은 치아가 숨결에 부가하는 냄새 때문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보통 동의하지 않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면 후각 신경에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18세기까지 이어진 구강 청결에 관한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구강은 인간의 첫 번째 소화기관으로서 음식물을 저작하여 분쇄하는 기능을 한다. 음식물 섭취 후 치아 사이 압입된 식편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으로 하여금 상당한 불편감을 경험하게 한다. 구강 청결은 이러한 불편감을 해소하거나, 구취, 미백 등의 다양한 욕구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잇 솔질을 위시한 구강 청결 행위는 치과질환 예방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의 치위생은 오늘날과 같은 예방적 의미의 목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중세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구강 청결은 정신 수양 혹은 종교적 의식 활동의 일환이었다. 동양에서는 청결한 구강이 경건한 마음을 가져온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쑤시개에 향을 첨가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풍습과 전통에 의해 칫솔의 부드러움이 결정되기도 했다. 일본의 흑치 풍습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충성을 나타냈는데, 검게 물들인 치아가 옅어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여성의 칫솔은 남자의 칫솔보다 부드럽게 만들어졌다고 한다.[17] 구강을 청결히 하는 것은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장례 의식 의한 부분으로 고인의 치아를 닦기도 했다. 이렇듯, 과거 구강 청결과 구강 상병의 연결고리는 매우 부족하다. 구강 세정 행위는 정신적 수양과 종 교적 신성함을 확보하기 위한 의미로 행해졌다.
그러나 곧 치위생의 역사는 ‘구취제거’라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도전했다. 윈브란트는 구강 악취 해결은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음을 언급하며, “입 냄새는 천년 동안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고, 이를 개선하려는 집착은 고대의 전통과 같다.”고 덧붙였다.[3] 아시리아인의 의학 책에는 “사람의 나쁜 호흡은 저질 음식과 나쁜 치아 상태 때문이며 […]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는 잠들기 전 불순물 이 없는 와인으로 입을 헹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고 기록되어 있다.[3] 구취제거는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기술되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흐름은 17세기 이후 미(美)의 추구로 이어진다. 17세기에는 각종 치과재료가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이자, 거울이 보편화 되어 일반 시민들도 자신의 미적인 모습을 추구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미소의 사회적 상징 또한 생기기 시작했는데, 때문에 구강을 청결히 하고 구취를 제거하는 여러 방법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발외과의들이 치아미백술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19세기 전까지 치위생은 식편압입으로 인한 불편함 해소와 구취의 제거라는 인간 본 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로 행해졌다. ‘구강 위생’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구강 세정은 좋은 냄새를 풍기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에서 시행되었다.
구강 위생을 치료의 관점에서 기술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전까지 구강 청결을 치료의 관점에서 기술한 문헌은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구강 청결을 구강 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권장했는지, 그 개연성은 확 인할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Babylonia)의 함무라 비(Hammurabi)법전에는 의학과 치의학에 관계 된 법이 기록되어 있다. 잇솔질(tooth brushing) 이 치아 치료에 도움을 준다는 구절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원전 7세기경 아시리아(Assyria)의 니네베(Nineveh)15) 지방에서 52가지 법칙의 의학기술에 구강청결을 포함시킨 기록이 존재한다.[12] 중세 말, 13세기 의학교육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 교수인 아르 쿨라누스(Joannes Arculanus, ?~14814)의 저서에 치아보존에 관한 10가지 구강 위생 수칙이기 록되어 있다고 전해진다.[12] 그러나 치아를 보존 하기 위한 수칙이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구강 질환의 예방에 도움이 되는 수칙이 기록된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의 의학자인 아라비아의 아불카심(Abulcasim, 1050?~1123)은 치석제거 기구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는데, 치석과 치주질환의 연관성을 연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12] 아시리아인의 의학 도서에는 이가 쑤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깨끗한 물로 여러 번 입을 헹구는 것이 좋다는 기록이 있다.[3]
우리나라에서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16)에 양치법이 처음 소개되어 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12] 15세기경 중국과 영국에서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칫솔을 발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12]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칫솔과 치약을 통한 구강 위생이 행 해졌다. 당시 ‘건강’의 개념17)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구강 청결을 구강 질환의 예방 내지 상태 유지와 관련하여 기술한 문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18)에는 매일 새벽 소금으로 따뜻한 물에 양치하는 것이 치아건강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금방(千金方)』19)에는 치석에 대해 언급하며 쇠꼬치로 치태를 긁어내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치석제거와 비슷한 행위가 당시에도 행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12] 『연수양노서』에는 식후에 농차로 양 치하고 치아를 서로 마주치면서 자극하는 습관이 치아건강에 좋다고 쓰여 있다. 오늘날 『연수양노 서』에서 언급된 차에 불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차를 마시는 것이 우식 예방에도 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졌다. 홍만선 (1643~1715)은 『산림경제』에 “음식을 먹고 나서 양치질을 하면 입이 향기롭고 이가 상하지 않는다 […] 뜨거운 물로 양치질을 하면 이가 상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따뜻한 소금물로 양치질을 하면 이가 튼튼해지고 장에도 유익하다.”고 언급했다.
서양에서는 포샤르(Pierre Fauchard)에 의해 치아 보존방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치의역사가이자 치과의사인 구에리니는 1909년 저서, 『A History of Dentistry From the Most Ancient Times Until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에서 포샤르의 저서 『Le Chirugien Dentiste』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 부분에서 예방을 뜻하는 prevention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고, 보존을 뜻하는 preservat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는 20세기 초반 구에리니가 책을 집필할 당시 치의학에 예방적 관점이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포샤르가 보존의 관점에서만 치의학을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방을 통해 보존이 가능한 것이므로, 예방과 보존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말이다. 또한 잇몸과 관련한 기술에는 강화를 뜻하는 ‘strengthening’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인간의 잇몸은 퇴축되기 시작하면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현대의 지식에 기초해 생각했을 때, ‘strengthening’은 잇몸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쉽게 쓸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포샤르는 그의 저서 『Le Chirugien Dentiste』에서 치아를 보존하는 법과, 하얀 치아를 유지하는 법, 그리고 잇몸을 튼튼히 하는 법 등을 소개했다.[23]
구에리니는 포샤르의 저서로부터 칫솔이 그 당시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포샤르는 칫솔 대신에 작은 스폰지를 사용할 것을 추천했다. 포샤르는 “부주의한 잇솔질은 오히려 치아를 망가뜨린다.”[13]고 주장했다. 포샤르는 “만약 가능하다면 치과의사에게 치아 클리닝을 받은 뒤, 매일 아침 따뜻한 물로 입을 헹궈라. 그리고 물에 독한 술을 1/4 정도 섞는다면 잇몸과 치아를 튼튼히 하기에 더 좋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또한 그는 양치질 약에 레몬이나 석류나무에 말린 가죽, 양귀비, 포도주, 향료 등을 더해 이것을 손가락으로 치아나 잇몸에 비벼 양치질을 하면 치아건강을 확실히 하는 효과가 있다고 기록했다. 그때까지 충치는 ‘치아벌레에 의한 병’이라고 여 겨지고 있었으나 포샤르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는 식사 후 양치질을 통해 치아에 붙은 찌꺼기를 씻어 낼 수 있는데, 이때 물에 양치약을 섞으면 살균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치은염이나 구내염의 개선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9] 포샤르는 1728년 출판한 『치과외과의』[23]에서 강철로 만들어진 치석제거기와 그 사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 했다.[23] 또한 치석을 제거하는 것은 잇몸의 부종과 잇몸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방법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스캐일링 술식을 제안한 것이다. 강철 치석제거기는 18세기에 들어서 치과의사부터 이발사까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9]
이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벨기에의 치과의사였던 세레(Jean Jacques Joseph Serre)가 남긴 구강 위생에 관한 책 외에 뚜렷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세레의 저서 또한 제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구강 위생에 관한 책이 특별히 인기가 좋아 짧은 기간이지만 1809년과 1812년 사이 베를린에서 2쇄까지 출판되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13]
19세기 전까지 치과의료에서 예방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통증이 시작된 뒤에야 치과의사를 찾았다.[24] 따라서 구강 청결을 통해 구강 질환을 예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치의학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강을 청결히 하고자 하는 행위 또한 구강 질환 예방의 일환으로 행해지기보다는 종교적 의식, 혹은 주술적 의미로 행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구취를 제거하거나 심미적인 이유에서 깨끗한 구강에 대한 선호가 있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이 ‘깨끗한 구강’이 구강 위생(oral hygiene)과 동일선상에 놓이지 않았다. 치과의료에서 ‘예방’의 개념은 19세기 중반의 일부 치과 선구자들이 ‘깨끗한 구강’의 이점을 인식하며 대두되게 되었다.[2]
‘구강 청결’의 본격적인 패러다임 변화는 19세기 들어 치과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종으로 자리잡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찾아왔다. 치과의사 팜리(Levi Spear Parmly)는 “치의과학의 느린 진보”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19년 『A practical Guide to the Management of the Teeth』에서 “치과진료는 일반적으로 기술이나 상업 활동 이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5] 이는 당시 내과 혹은 외과 의사들의 견해와도 일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견해는 1840년 발행된 영국 잡지 The Forceps에 “순수한 외과의는 […] 치아와 같이 사소한 것들 것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팜리는 이후 치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주장을 하나 하게 된다. “치의학 영역의 발전 여부는 사회가 치아의 질병 예방의 중요성을 주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한 것이다.[3]
팜리의 주장은 아마 당시 많은 치과의사들의 입장을 대변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밀러 (Willoughby D. Miller)가 현미경을 통해 우식의 병인과 기전을 밝혀내면서 치의학은 마침내 예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예방의 역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치의학은 치면세마(dental prophylaxis)를 통해 우식과 잇몸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고, 과학이 뒷받침해주었다. 1844년 헤이든(H. H. Heyden)과 해리스(Chopin Harris)는 미국치과과학학술지(The American Journal of Dental Science)에 “Dental Hygiene”이라는 논문을 투고했다. 이때가 치과 위생(dental hygiene) 처음으로 단독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5년 뒤 이들은 논문을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 책에서 해리스는 “치아의 위생은 지금까지 완벽히 무시되어왔다.”[26]고 기술하면서 구강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구강 위생을 철저히 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공중구강보건교육에서 1일에 4-5회씩 왁스가 칠해진 치실(waxed dental floss silk)로 치아를 깨끗이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팸플릿을 제작하여 구강보건을 위한 지식 전달에도 힘썼다. 미국의 치과의사 레인(M.L. Rein)은 치과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효과적인 잇솔질법을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 25년 뒤 1870년에 뉴올리언스(New Orleance)의 맥래인 (Andrew McLain)이 영양과 구강케어의 관계를 중심으로 『Prophylaxis in the Field of the Dental Surgeon』이라는 책을 썼다.[26] 1890년에는 뉴욕의 앳킨슨(Atkinson)이 『Prophylaxis in the Field of the Dental Surgeon 』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1) 치과질환을 피하기 위한 것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얻어지는 예방(豫防, prevention), 2) 예방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의 영양(營養, diet), 3) 언제나 예방에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위생(衛生, hygiene), 4) 식사나 위에 나열한 것들을 가르치고 환경을 갖추고 더욱이 병태를 제거하는 넓은 의미의 예방적 처리를 하는 것을 포함한 양생(養生, regimen)을 주장하였다.[26]
초기의 막연한 구강 위생 개념은 이러한 연구로부터 공중구강보건교육에 대한 개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87년 미국 앨라배마주 치과협회 (Alabama Dental Association)에서 초등학교 학생 대상의 구강보건교육을 실시하였다. 1894년 필 라델피아의 치과의사 스미스(David Smith)는 이러한 여러 주장을 실제로 임상에 적용하여 자신의 가족과 환자에게 실행하며 본격적인 예방 치과사 업을 실시하였다. 그는 환자에게 직접 구강 위생 관리법을 교육하고 구강보건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치아의 외래성의 부착물의 악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치면의 청소”[26], 즉 치석의 제거를 철저히 이행하여 치면연마를 해야 한다는 방법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20세기 초 ‘깨끗한 구강’ 즉, 구강 위생의 개념과 구강 질환 예방의 개념이 빠르게 융합되기 시작했다. 치아를 단순히 어느 정도 쓰면 빠지는 것으로 인식하기보다 구강상병을 예방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후 구강 위생을 통한 구강 질환의 예방은 종종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여러 기록이 남겨진다. 스미스는 1899년 International Dental Journal에 “Prophylaxis in Dentistry”를 기고하며 치면세마를 강조하였다. 1901년에는 1899년의 기고를 발전시켜 “Oral Prophylaxis”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하여 주기적인 치태 제거에 대한 가치를 언급했다.[26]
스미스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1910년 런던에서 개최된 학회에서도 주기적 치태제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고, 그 전문이 나기라 타츠미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때 나기라는 “oral prophylaxis”를 “구강예방법”이라 번역하였다. 나기라는, 스미스의 시스템은 “치면이나 잇몸에 부착된 모든 분비물과 치석 등을 전부 제거한 뒤 치면을 퍼미스(pumice) 등으로 완전히 연마하는 방법”이기에 “단순한 잇 솔질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해설했다.[26] 스미스는 주기적인 예약을 통한 구강 관리를 통해 구강 건강뿐만 아니라 전신 건강까지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팜리는 왁스 치실을 주기적으로 사용할 것을 추천했고, 레인은 환자들에게 집에서 할 수 있는 구강 관리법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위의 주장들은 모두 구강 질환의 예방을 개인 구강 위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치과의사들은 이 ‘구강을 청결히 하는 행위’를 전국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했다. 치과 진료실에서 전문가에 의해 주기적으로 꼼꼼한 관리를 받도록 하고, 학교 등의 공공기관에서 치면세마를 통해 구강 상병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직적 움직임을 치위생 운동 (dental hygiene movement)이라 한다.[27] 치위생 운동은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다. 1902년 라이트(Cyrus Wright)는 팜리와 레인 등의 아이디 어를 반영하는 몇 개의 글을 출판하며 치과의료의 하위 전문분야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이상적인 구강 건강을 유지하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새로운 전문가 집단의 개념과 필요성이 소개된 것이다.[24] 치과위생사의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인데, 당시 치과의사들은 구강 질환 예방에 관련 된 업무를 후순위에 놓았다. 그들은 치아를 청결히 하고 치면을 세마하는(dental prophylaxis) 예방 관련 업무를 기피했다. 아데어(Robin Adair)의 문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26년 미국 조지아(Georgia)주 치과의사 아데어는 치과위생사의 실무와 고용에 관한 설문을 작성하여 100여 명의 조지아주 치과의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돌려 받은 답변을 정리하여 “The Dental Hygienist - A History of, And Present Problems Encountered By, Her Employment”라는 글을 The Journal of the American Dental Association에 기고했다.
아데어의 글에 의하면 치과의사들은 “치과 위생사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하는가?”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나는 치과위생사를 고용하는 것을 굉장히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나보다 치면세마를 더 잘하고,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치과의사들은 치아 청소를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안 한다.” 또 다른 치과의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치과위생사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예방서비스를 환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없으면 치과의사들이 다 해야 할 텐데, 그 값을 받고 할 치과의사는 없다고 본다.”20) 아데어의 글을 통해 20세기 초 치과의사들은 경제적으로 효율성이 떨어지고 술식의 선호도가 낮아 예방 진료를 후순 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1] 예방 술식의 경제적 효율성은 일본의 나기라가 소개하는 스미스의 논문에서도 언급된다. 나기라에 의하면 스미스의 논문에서 치과대학 졸업생 중 한 명이 “스미스씨 당신의 처치방법은 나를 흔들리게 하지만 그 방법을 따르게 되면 나는 실직하고 맙니다.”고 우려를 표 한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치과의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개업했기에 나는 당신의 방법을 실시하기보다는 1회 3달러당 치아를 충전하여 돈을 벌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스미스는 치과의사의 도덕성을 설명하고 예방의 중요함을 주장하였다고 전해진다.[26]
예방에 관심을 가졌던 치과의사들에게는 예방 관련 업무를 맡길 전문인력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치과의사는 치과 진료실의 보조원(assistant), 혹은 치과 간호사(dental nurse)들이 위와 같은 업무를 맡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1] 그러나 19 세기 말까지만 해도 치과진료실에 치과 간호사 (dental nurse)라 불리는 보조원(assistant)이 상주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치과 보조(dental assist)라는 개념 자체가 혁신적인 축에 속했다. 폰즈가 라이트를 치위생의 미래를 본 선구자로 칭했던 이유도, ‘치과 보조원’이라는 직업조차 없던 시절에 진료실에서 치과의사와 함께 일하는 치과위생사라는 하위전문가(sub-specialist) 그룹의 필요성을 주장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2]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현대인에게 익숙한 많은 것들이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존재하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았으며, 혁신적 (innovative)이라 불리기까지 했다.[1] 구강 위생 (oral hygiene)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고대의 구강 위생은 종교적 의식이자, 주술적 의미로 행해졌다. 치아를 깨끗이 하는 행위의 목적으로는 구 취를 억제하고 치아를 하얗게 만들기 위함이 컸다. 구강 위생과 구강병의 예방은 동일선상에 놓 일 수 없었다. 구강 위생의 관점 변화과정을 탐구 하는 것은 오늘날 치과위생사의 탄생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관련 주제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본 논문 이 관련 연구의 시발점이 되기 바라며, 치과위생 사의 탄생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후속 논문을 통해 발표하고자 한다.
IV. 고찰
지금까지 구강 위생의 역사에 대해 기술해보았다. 인간이 청결한 구강 상태를 갖기 위해 시도했던 여러 방법을 다양한 관점에서 연대순으로 압축해 기술하고자 했다. 구강 세정 혹은 구강 청결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소위 ‘구강 위생’이라고 생각하는 행위, 풍습, 의식들과 관련된 역사는 굉장히 지엽적인 내용들이다. 자료들이 많지 않음은 물론이다. 치의학사가들이 치의학의 역사를 기술한 문헌을 바탕으로 관련 내용을 수집할 수밖에 없었다. 치위생학계는 치과위생사의 탄생 후 100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치위생 이론정립 등 치위생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위생사가 기술한 구강 위생과 관련한 역사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늘날 치위생의 사전적 의미는 ‘구강 건강에 주의하고 예방과 질병의 치료에 힘쓰는 일’21)이다. 치위생학과는 ‘구강질환의 예방 및 치과 진료 업무 등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학과’22)라 정의 된다. 20만년 남짓한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방적 관점의 구강 위생 혹은 치위생이 시작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치위생은 결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치위생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이에 낀 음식물로 인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적 의무에 의해 이를 쑤시고 입을 헹궜다. 로마 시대 이후 구강 세정은 구취를 제거하고 하얀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치위생은 본능적이고 취향 주도적인 수요에 의해 흘러온 영역이었다. 18세기까지 구강청소는 대게 구취제거와 치아미백을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치석을 제거하고 음식물 잔사를 제거하는 것이 치아 우식과 잇몸병을 늦출 수 있다는 견해는 현미경으로 치면세균막과 구강세균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구강청소와 구강질병의 연결고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예방’이라는 관점이 자리잡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옛 문헌에서 ‘예방’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기 쉽지 않았다. 관련하여 주로 쓰인 표현으로 ‘치아를 보존하다(preservation)’, ‘잇 몸을 튼튼히 하다(strengthening)’, ‘통증을 피하다 (avoid)’ 등이 있었을 뿐이다. 구강청소 등 충치 유발균을 억제하는 ‘예방’적 술식이 치아를 ‘보존’하고 통증을 ‘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함을 인류가 깨닫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치통을 피하기 위한 염원을 담아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날 치의학과 치위생학은 과거 “구강관리라는 용어가 의미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해졌다.”[20] 표면적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 행위양상은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며 행위에 부여된 과학적 정당성과 행위 결과에 대한 인식이다. 18세기까지 이발외과의들 및 이발사들, 혹은 일부 치과의사들에 의해 행해지던 구강청소가 오늘날 ‘예방관리’, ‘잇솔질교육(tooth brushing instruction)’, ‘잇몸관리’ 등의 서비스 형태로 바뀌며 구강병의 예방이라는 과학적 정당성이 부여된 것이다. 이런 과학적 정당성에 힘입어 오늘날 스케일링과 잇솔질교육을 위시한 예방업무는 치과위생사 업무 중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위생사 업무 범위 확립 과정에 관한 역사적, 그리고 철학적 고찰이 부족한 현실이다. 본 연구는 문헌고찰을 통해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루며 오늘날 치과위생사의 역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가를 탐구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누구의 필요에의해 어떻게 인간의 구강 위생 행위가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치위생의 내러티브’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칫 진료협조와 예방으로 고착될 수 있는 치위생 패러다임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V. 결론
본 논문을 통해 치과위생사가 치과의사에 의해 형성된 직업 정체성에 갇히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기를 희망한다. 대부분의 제도와 시스템이 치과의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업무범위와 직업 정체성의 고착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위생사들은 치과의사가 창조한 치과위생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치위생 본연의 정체성을 찾아가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치과위생사가 진료실에서, 치과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서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더욱 주체적인 역할을 해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 구체적 방법에 관해서는 추후 연구에서 논의해 보도록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 구강 위생 행위가 개인의 구강 위생 욕구의 해소를 위해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 욕구라 함은 단순히 물리적 혹은 심리적 욕구이기도 했으며, 한 사회의 전통적,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주술적 관습에서 파생되어 온 규율에 기초하기도 했다. 즉, 과거 구강 위생은 문화와 개인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의학에서 인간이 소외되어 가는 오늘날 이와 같은 역사의 증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에서 치위생 소명에 대한 탐구가 시작할지도 모른다.
치과위생사가 치과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서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주체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우리의 제안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다 심도 있는 고찰을 필요로 한다. 임상윤리는 관계의 윤리이기도 한데, 우리의 주장은 서사적 역량을 통해 환자 혹은 고객과 보다 깊이 관계 맺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치과위생사가 치과를 찾는 고객과 어떠한 관계를 지향하는 가에 따라 윤리적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서사를 경청한다 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환자의 은밀한 영역까지 개입함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밀보장의 윤리적 관점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만약 치과위생사가 진료 협조의 역할에 매진하고자 한다면, 고려해야 할 윤리적 딜레마들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반면 치과위생사가 서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보다 많은 윤리적 책임을 동반할 것이다. 선택은 치과위생사들의 몫이다. 그러나 구강 위생이 과거 인간의 삶 속 환경, 문화, 풍습, 의식 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변화해 왔음을 고려할 때, 치과위생사가 서사적 역량을 발휘하며 고객 혹은 환자의 삶 속에 보다 깊숙이 개입하여 역사적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기를 희망한다.
마치 미(美)를 적극적으로 갈구했던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 귀족들처럼. 치과위생학은 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역할을 독려해야 한다. 구강 위생의 역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접근방법과 해석 방법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구강 위생의 역사적 고찰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위생학이 길을 잃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